아버지!
소쩍새 우는 이 밤은 또다시 봄입니다.
아버지가 나고, 난 곳으로 돌아간 봄이에요.
아버지 평안하신지요?
이 철없는 자식은 때때로 아버지를 흉보았어요.
왜 사내답지 못하고, 쩨쩨하게 사냐고 입 밖에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왁왁
소리를 질렀답니다.
지금 제 나이보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제가 초중학생 때였을 거예요. 그때는 자식들이랑
놀아주지도 않고, 어딜 데려가는 법도 없이 날마다
일만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답니다. 우리들은
일요일에 학교를 쉬는데 수요일에 쉬는 아버지가
아주 마땅치 않았지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 머리
굵어가는 자식 넷을 키우느라 아버지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살았다는 걸. 아버지, 당신의 맏아들이
어리석어 그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알았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였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성장할수록
아버지는 점점 낯선 영감님이 되어 갔지요. 백발이 성성한.
그런 아버지를 보는 게 제게는 적지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 기억하세요?
맏이로서 먼 제주 땅에 살면서, 늘 죄송했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늘 곁에서 지켜주기를 바랐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답니다. 그래 매일
고민하면서도 그 말을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전화를 드리면서도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당신의 큰 며느리인 정희한테 처음으로 장미꽃다발을 선물
할 때보다도 더 고민하다가 “아버지 사랑해요.”했을 때
아버지는 수화기 너머에서 움찔 하셨지요. 한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가 “술 마셨냐?”했을 때 아버지도 웃고, 저도 껄껄
웃었지요.
아버지 그때가 그립습니다.
다향이의 중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입원했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아버지의 건강이 그렇게 나빠졌다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제 초등학교 시절의
얘기. 아버지가 젊었을 때의 얘기를 기록해 두었다가 아버지
앞에서 읽어드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일하신 아버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비웃었습니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게 죄가 아닌데도 그랬지요. 아버지, 그래서 저는
아버지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 그 책이 발간되면 책의 제일 앞에 서양 사람들처럼
‘아버지 오재만, 어머니 변임순 앞에 이 책을 바친다.’고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늦었지요.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는 잔뜩 긴장했던 어머니가 나사 풀린
것처럼 마구 무너졌지요. 아버지의 제사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동생들한테 “어떻게 하긴? 우리 집에서 모셔야지.”
하니 동생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명절 때는 비행기 표를
구하기도 힘들고, 값도 비싸니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그럼 너희들 편한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기일은 맏이인 제가 제사를 지내고, 둘째는 추석에, 막내는
설에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기로 했지요. 하지만 자식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제수씨들한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말을 형제들 중에 가장 많이 기억합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조금 먼저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갓난아이인 저를 안고 계시다가 때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나면 얼른 내려놓으셨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제수씨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고요. 아버지가
섭섭하실 수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의 총기가 때때로
흐려졌습니다. 셈이 밝던 분이 때때로 엉뚱한 소릴 했지요.
그래 동생들한테 물었습니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면
어떻겠냐?”고.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욕을 먹었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어도 남자들만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던
시대와는 달리 맞벌이를 해야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는 시대에
나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버지도 알다시피 그
때는 한 달에 이자만 백만 원이 나가던 때였습니다. 자기된
도리는 아니지만 난생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어머니한테 식사를
대접하고, 차를 내려드릴 때 어머니는 외롭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찻집에서 손님을 맞거나 1,600평이나 하는 땅을
돌보러, 혹은 장작을 하느라 바깥에 있으면 어머니는 홀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어머니의 정신이 들쑥날쑥 했고요.
노인들은 외롭지 않은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텔레비전드라마를 보더라도 함께 웃고, 우는 동료가, 맞장구치는
동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제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겁니다.
아버지! 어쨌거나 어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세요. 그리고 제
짐작처럼 집에 있을 때 보다 훨씬 건강해 보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동생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온대요.
그래 오늘은 정성껏 음식 몇 가지를 장만했습니다. 모든 걸 잊고
내일 하루라도 어머니아버지께 기쁜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품이 그립습니다.






> 


최신
이전



















마시멜로
아버님에 대한 생각이 절절하셔요...
저도 그렇거든요...
엄마는 지금 동생집에 게시지만..
아버지는 몇 해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는 딸만 있기도 하지만 언제나 제가 아버지 제사 준비를 한답니다..
그래서인지 제 꿈에 늘 나타나주셔서 저를 격려해주시곤 합니다..
아버지 어머님께서 기쁜날이 되셨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답글
오성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