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 말이 많으면 쓸 만한 말이 없다

글쓴이 소엽

등록일 2013-05-10 17:08

조회수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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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으면 쓸 만한 말이 없다]

혜민 스님


새벽에 일어나 학교 교정을 홀로 걷는다.
해가 뜨기 직전이라 대지는 아직 고요하고
하늘의 별과 달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상쾌한 새소리가 들려오고, 자박자박 걷는 땅에는 이슬이 맺혀 있다.
늘어서 있는 나무는 도반이 되어준다.
성당과 절과 같은 사원이 신성한 장소라면,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은 신성한 시간이다.
 
세상에 휩쓸려 정신없이 바빴던 전날의 기억을 잠시 벗어놓고,
내 본성과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는 순결한 시간이다.
누구라도 이 신성한 시간에 깨어 조용히 여유를 가지고 홀로 걷다 보면,
새벽 기운에 스스로 정화되어 평소에 막혀 있던 물음에 대한 답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언제부턴가 우리 손에 스마트폰이 분신처럼 따라다니면서
생활이 아주 편리해진 점도 있지만, 반대로
나무와 달과 이슬 맺힌 땅과 만나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나 e메일을 체크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식사할 때도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자신도 모르게 자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내가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마트폰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다.

 지난달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묵언수행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도
사실은 당분간 디지털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연, 그리고 나의 본성과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에서였다.
 
“너무 말이 많으면 오히려 쓸 만한 말이 없다”고 하셨던 법정 스님의 말씀이
올해 들어 뼈저리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삶에 용기가 되는 말,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들을 하겠다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말들의 홍수 속에서
나도 같이 침잠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만이 아니고, 개인 e메일로까지
사람들의 토로와 고민 상담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그리고 왜 답이 없느냐고 따지듯 물어오는 메일을 볼 때마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어른 스님들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수행자는 세상의 경계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즉, 누가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아니면 반대로 비난한다고 해서
세상의 말들에 휩쓸려 본성을 잃고 휘청거리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여여하고 차분하게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상담 내용에 따라, 그리고 상담의 빈도에 따라
마음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비극적인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도 따라 가슴이 아프고 힘들었고,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어떤 이의 고통 때문에 하루 종일 가슴이 저릿한 상태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소셜미디어나 e메일을 체크하며
나를 향해 끝없이 쏟아지는 글들을 보면서
내가 해야만 하는 말들의 늪 안으로 중심을 잃고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새벽의 포행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방석 위에 조용히 앉는다.
몸의 움직임을 줄이고 차분해지면, 생각이 쉬면서 마음도 따라 고요해진다.
 
몸 안으로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에 주의를 둔다.
가득 찼던 숨이 몸 밖으로 나가면서 몸 안에 빈 공간을 만들어놓는다.
그리고 이 텅 빈 공간은 놀랍게도 평화로움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매 순간 숨을 쉬지만 마음이 자꾸 외부로만 향해 있기 때문에
숨이 가져다주는 이 단순한 텅 빈 즐거움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고 산다.
이 평화로움과 편안함은 내가 뭔가를 해서 얻게 되는 결과물이 아니고,
이미 내 안에 갖춰진 건강한 안락함이다.
 
미래로 가 있는 우리의 마음을 현재에 두고,
나의 주의를 안으로 잠시 기울이다 보면, 언제나 만날 수 있게 기다리고 있다.

 10대 때 처음 ‘깨달음’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무작정 그것이 하고 싶었다.
도대체 뭘 깨닫는 것인지도, 깨달으면 뭐가 좋은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몸, 생각, 느낌 이외에 초월적인 뭔가가 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를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닌 나 스스로가 깨닫고 싶었다.
 
앞서 수행하셨던 분들께 많은 질문을 했던 내가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어쩌다 보니 이제는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듣고 그것에 대답을 해주는 처지가 되었다.
아직도 수행이 한참 부족하고 닦아야 할 번뇌와 습기가 눈앞에 버젓이 보이기에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말이 많아질수록 침묵이 그리워진다.
수행을 좀 더 깊게 하고 싶은 소망 하나만 남는다.

                                                                                                                         

 [중앙일보] 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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