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밤만 자고나면 열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입니다.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구 년째라니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 세월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기다림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녀를 만나면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암울하기만 했던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까짓’하면서
유치하게만 여겼던 유행가 노랫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그 가사 하나하나가 모두 내 얘기처럼 다가오면서 말입니다.
그녀를 매일 만났습니다.
신촌에서 종로에서 명동에서 모임이 있을 때는 당연한 일이었고,
모임이 없는 날에도 그랬습니다.
아침에 만나서 저녁 늦게까지 붙어있으면서도 뭔 할 말이 그렇게도
많았는지 또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가 어머니의 호통을 듣곤 했지요.
그녀가 무작정 좋았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만큼 힘들게 하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약속시간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약속을 하면서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제시간에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조금 늦으면 삼사십 분,
보통은 한 시간, 어떨 때는 한 시간이 넘어서 전화를 해도
‘이제 출발할 거’라던 그녀.
일 년 반 동안의 연애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혼여행 내내
몸에 손끝하나 못 대게 했던 그녀. 그래 삼십년 동안 지켜왔던 순결을
혼인 뒤에도 백일동안이나 지켜야했지요.
그렇게 기다림의 세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제오후 낙지볶음거리를 준비하다가 그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회식이 잡혔다는 말에 맥이 탁 풀립니다.
밤 열시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책을 읽습니다.
열한 시에 전화를 거니 곧 출발할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목소리에 취기가 있습니다. 그래 차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대리기사를 부르겠다고 합니다.
열한시 삼십 분이 되니 졸음이 쏟아집니다. 그래 나가서 찬바람을 맞는데
달이 희뿌연 게 비라도 뿌릴 것 같습니다.
다시 들어와 책을 읽다가 열두시에 마중을 나갑니다.
잠바를 걸치고 나가 이제나저제나 기다립니다. 전화를 거는데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신호음만 들려옵니다. 불안감이 몰려옵니다.
‘직장생활이 다 그렇지 뭐!’라고 생각해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컷들의 폭력성을 - 여자들을 내 어머니나 누이, 딸처럼 생각하는 수컷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 알기에 그렇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봅니다. 다행히 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집 앞을 오락가락합니다.
차들이 올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지만 번번이 다른 자동차들입니다.
이럴 때면 ‘공연히 그녀를 쫓아다닌 게 아닐까?’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녀를 좋아한 학과선배들 중에는 부잣집아들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 기회를 박탈한 게 아닐까? 못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밥벌이의 고단함을 감내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드디어 기다리던 자동차가 옵니다.
대리운전기사가 내리고 그녀도 따라 내립니다. 휴우! 긴장이 풀어집니다.
집 안으로 들어와 같이 양치질을 하고, 같이 씻습니다.
먼저 잠자리에 누워 그녀의 자리를 따뜻하게 만듭니다.
지친 그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따뜻한 마음씀씀이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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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천사
밥상맨님 결혼기념일 미리 축하드릴께요.
어쩜...밥상맨의 글을 읽고 있자니 자꾸자꾸...
남자도 저런 감수성의 생각 할 수 있다는걸...처음 느껴 봅니다.
대한민국 남편들이 밥상맨님의 글만큼만
마음을 표현해 주면 여자들이 얼마나 친구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일까요.
무뚝뚝한 남편을 가진 여자의 넋두리 였습니다.
답글
밥상차리는 남자
과분한 말씀입니다 미즈천사님.
그리고 결혼기념일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