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 참석할 때나 예의를 갖춰야할 곳에서 입을 옷을 찾을라치면
긴 한숨이 먼저 나옵니다.
또 산책(운동)을 하거나 다향이랑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만난
정희씨의 반응을 보면 '또 잘못했구나!'싶어 움찔합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제주로 이사온 분이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다향이한테 주겠답니다.
그런데 자전거타이어에 바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걸 끌고 상예동에서 중문동까지 한 시간 동안이나 걸어왔습니다.
해는 나지 않아지만 우기의 습도로 인해 온몸이 흠뻑 젖었습니다.
내게 아이가 없었더라면 , 아니 내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더라면 그걸 바로 끌고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전거에 바람을 넣는 기구를 빌리거나 소형트럭을 가진 분에게 부탁했을 텐데
다향이는 자전거를 가져올 아빠를 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끌고오다가 집에서 가까운 오토바이가게에서 바람을 넣었습니다.
그걸 타고 돌아오니 다향이 얼굴가득 웃음이 번집니다.
과천에서부터 타고놀던 자전거가 부식되어서 버린지 일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멋지고 깨끗한 자전거를 가져오니 기쁠 수밖에요.
자전거를 보자마자 타고 놀며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혜준이네 집에 놀러가자고 합니다.
혜준이, 준성이랑 같이 타고 싶다는데 자랑하고싶어 못견디는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잠깐만 아빠 숨 좀 돌리고."라며 양해를 구합니다.
찬물로 씻고, 물도 마시고 잠시 누웠다가 일어납니다.
다향이가 자전거를 타고 내 주위를 맴돌면서 혜준이네로 갑니다.
혜준이네 집으로 가다가 "아 참, 엄마한테도 보여줘야지."합니다.
정희씨가 밖으로 나옵니다.
동사무소마당에서 자전거타는 다향이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내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만 한심스런 표정을 짓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셋이서 지냈습니다.
커피매니아반 수업이 있는 날이라 제주시에 가야하지만 휴강이 되었습니다.
정희씨가 바다로 산책을 나가자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말합니다.
"오늘, 어떤 걸 입을까?" 정희씨가 옷을 골라줍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반팔옷을 꺼내주고, 반바지도 골라줍니다.
정희씨가 건네준 옷을 입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늘 하던대로 컨벤션센타와 씨에스호텔, 천제교를 지나 소리섬박물관과
테디베어박물관을 거쳐서 신라호텔까지 갑니다.
그곳 북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로비의 의자에 앉았을 때 조용히 얘기합니다.
"정희씨. 이 옷은 내가 가장 아끼는 거예요.
모임이 있거나 신경써야 할 때 입느라 평소엔 꺼내입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내 옷들이 모두 이 정도만 되면 좋을 텐데 요것 딱 하나뿐이에요.
당신의 바람처럼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갈 때, 마트에 갈 때도
나도 이런 옷을 입고 싶어요."
"......"
"하지만 살림하는 지난 10년 동안 제대로 된 내 옷을 사보지 못했잖아요.
환경생각도 있지만 생활비아끼느라 '아름다운 가게'나 '녹색가게'에서만
옷을 샀잖아요. 그런데 여자들 옷과는 달리 남자들 옷은 많지 않아서
대충 크기만 맞으면 사 입었지 색상이나 디자인같은 걸 고민해본지는
꽤 오래되었네요."
"난, 그런 줄 몰랐어요."
* 클럽 '밥상맨의 수다'에는 그동안 쓴 170여 편의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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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모든일을 척척 잘하시니
옷도 마음에 맞는거 사입는줄 아는 정희씨...
동사무소 마당까지 갈려고 생각했음
아내에 대한 배려도
후즐근한 남편 바라보면 아무래도 기분이 영 ~
정희씨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여름옷 마음에 맞는옷 준비해서
정희씨 하고 데이트 갈때 꼭 입고 가새요..
답글
밥상차리는 남자
예, 분꽃님.
정희씨만 제 맘을 몰라준 게 아니라
저도 정희씨마음을 몰라주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깨우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핑크마미
언젠가는 '밥상차리는 남자'가 아니라 '옷만드는 남자''재주많은 남자''알뜰한 남자'
이런 닉네임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도 남편 옷 골라주지 않은지 꽤 되는데(그사람은 뭘 사줘도 불평이 많아서리...)
정희님도 미처 신경써주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이 있을 것 같네요.^^
알뜰함도 좋지만 표나지 않을때는...가끔 나를 위한 선물도 준비해 보세요.
알뜰함에 표나지 않을 정도로만...^^
답글
밥상차리는 남자
예 핑크마마님.
'나를 위한 표나지 않을 정도의 선물'
내 스스로에게 하나 하려고 마음먹습니다.
일본에는 그런 아버지 모임이 많다고 합니다.
'쿠키굽는 아빠모임", '뜨게질하는 아빠 모임' 등등.
우리나라도 정치사회적인 모임말고
재미있는 아빠들의 소모임이 활성화되길 바랍니다.
'삼겹살에 소주마시는 모임' 이런 건 말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