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그땐 그랬다.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다.
키가 다 크지 않은 그게 좀 아쉬웠지만 아무튼 정신적으로 나는 다 자랐다고 생각했었다.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바둑이도 안녕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비새끼처럼 입을 딱딱 벌리고 목이 터져라 운율에 맞춰 국어책을 읽으며, 정말 난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다.
책가방에 교과서를 챙겨넣는 어린애가 어디 있는가?
학교 옥상에 커다랗게 쓰여진 반공 방첩을 척척 읽어내는 내가 어찌 어린애 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한문으로 된 내 이름자를 척척 써대는데 어린아이 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어른들의 말에 열심히 끼어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른들은 키가 작으면 어른이 아닌 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얼마나 지적이며 생각이 여물어 때론 사색적이 되기도 한다는 걸 눈치조차 못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국민학교 1학년짜리 애기' 라고 생각하는 커다란 실례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른들 일을 궁금해하고 어른들의 의논성스런 말에 끼어들면 그들은 ' 떼끼! 어른 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드는거 아이다!' 하며 나를 밀쳐냈다
이렇게 분할 수가!!
내가 어린아기가 아니란 걸 알려주기위해서는 의젓하게 책읽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어이구 ~~ 우리 애기 ~ 책도 잘 읽고~'
이런! 책읽는 걸로는 내가 이미 어른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절망했다
그러나, 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이건 내가 어려서 그랬던게 아니다! 키가 작아서 할 수 없이 치마꼬리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 논일 하는 할아버지랑 삼촌 새참을 내다주는데 따라갔을때
마침내 난 내가 어른 몫을 해낼 수 있는, 나도 어른임을 증명할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어른들이 하는 '일'을 어른들처럼 해내면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정중하게 나도 한몫을 할 수 있음을 말씀드렸다
'할아부지, 나두 하꺼야~'
손녀말이라면 되도록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자 하는 할아버지였지만 그땐 바쁜 모내기 철에 걸치적거린다고 거절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뜻을 전달드렸다.
'시러~!! 나두 할래에~~!'
그리고 굳은 결의의 표시로 두팔을 늘어뜨리고 어깨를 흔들며 강하게 의견을 말씀드렸다
'하꺼야아~'
결국 내 강한의지와 결연함에 놀란 할아버지는 못줄을 잡게 해주셨다.
나를 한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못줄은 모내기 할때 모를 반듯하게 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했다.
내 건너편 못 줄을 누가 잡고 있었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아무튼 그 사람과 내가 호흡이 잘 맞아야
못줄을 척척 옮겨줄 수 있는데, '어른'인 나는 잘 하고 있는데 그쪽에서 못했던 것 같다.
일껏 빤쓰까지 내보이며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못줄을 붙들고 있었는데 두어번 못줄을 옮긴 후
할아버지가 할머니더러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 델꼬 집에 가그라!'
약간 절망적인 기분으로 다시 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돌아왔는데 분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의 일은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못줄 잡기 따위는 애들도 하는 일이아닌가?'
그랬다!
못줄잡기따위의 하찮은 게 아닌, 정말 어른들이 하는 일을 제대로 해치우면 그들은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줄 것이다.
애들이 절대로 못하는 어른들의 일! 그건 바로 밥짓기!!!
당시엔 쌀에 돌이 섞여있는게 당연한 일이라 쌀을 씻고나면 조리질을 해야했다.
조리를 살살 돌리면 쌀만 담기는데, 아, 그게 얼마나 하고 싶었던지!!
독에 있는 쌀을 퍼서 곰보처럼 생긴 양은함지에 부었다.
바께쓰에 있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할머니가 하던대로 쌀을 박박 문질러 씼었다.
그리고 드디어 조리질!
할머니가 조리질을 할때마다 그 얼마나 하고 싶었던가!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할머니가 할때보면 조리를 뱅뱅 돌리기만 하면 쌀이 쏙쏙 올라와서 담기는데,,,
내가 조리를 돌리면 조리가 쌀속으로 처박히기만 했다.
아니면 함지위로 헛돌거나....
그래서 포기하고 쌀을 솥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이려니, 성냥을 켤줄 모르는거다! 어른인 내가!
(당시 난 충청도 시골에서 조부모님과 살았고, 그때 그곳은 연탄도 없이 장작불을 땠었다)
결국 첩첩난관에 부딪혀 밥짓기를 포기했지만, 뭐 어른이 하는 일이 밥짓기 하나 뿐이더냐?
궁리를 하다가 커다란 솥단지를 닦기로했다
평소 할머니가 씩씩거리며 닦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게 보여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내가 저 커다란 솥단지도 척척 닦는 어른이란걸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 우물가로 솥단지를 질질 끌고 갔다.(희끄무레한 알루미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늘 보던대로 지푸라기를 꽁꽁 뭉쳐서 바닥의 모래를 짚으로 슥 닦아서 솥단지를 닦기 시작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평균보다 덜 나가는 키였던지라 내가 자꾸 솥단지 안으로 꺼꾸로 처박힐 것 같았다.
그렇게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내가 어른임을 열심히 증명하고 있는데
깔깔깔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열식구네 아줌마, 건너집 할머니와 함께 우리 할머니가 다 떨어진 삼촌 난닝구에 회색뽀뿔링 치마를 입고
깔깔 웃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구 애기가 지 만한 솥을 닦구 있네~ 기특해서 워쩐댜~'
'조막만한 손으로 저거 닦는거 줌 봐유~ 깔깔깔깔~'
아니,, 내가 기대했던 말은, 아이구 저렇게 큰 솥단지를 닦는 걸보니 다 컸구나.
그러니 앞으로 어른들 말에 열심히 참견을 해도 괜찮다
라는 어른으로서의 인증을 받는 것이었는데,,,,, 내가 한 솥단지포퍼먼스는 그냥 애기의 재롱으로,
한동안 동네 아낙들의 수다로 , 한때의 일화로 그렇게 남고 말았다...
'할무니 죽는게 머야?'
그해 추운 겨울 밤 할머니 팔을 베고 나는 어떤 철학적 감상에 빠져 이렇게 물었었다
'사램이 죽으마 숨을 안쉬고 손발이 차갑게 되는데 그기 죽는기다'
그때 내 손이 차가웠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쳤다
'할무니! 나 죽었나봐!'
생과 사에 대한 철학적인 내 고뇌도 할머니의 커다란 젖가슴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할머니가 귀엽다고 꼭 끌어안아버렸던 것이다.
그 겨울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난 병풍으로 관을 가린 방에서 할머니를 졸라 민화투를 쳤고
마당에서 아이들과 고무줄을 하고 놀았다.
죽음이 어떤 건지, 어른이 되고자 했고 어른인 척했던 시건방진 꼬맹이는 몰랐던 것이다.
오래전에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이제 그렇게 소망하던 어른이 됐다
그때 난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불혹을 넘긴 지금 난, 어른으로 몸은 성장했지만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난 아직도 덜 큰 것 같다.. 아니 어쩜 죽을때까지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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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차리는 남자
옛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땐 그토록이나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니 다시 유년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서너 살 때 어머니가 동네 다리 밑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보고 아주머니들이 놀렸습니다.
"이제 너 어떡하니? 거머리가 피 다 빨아먹어서 죽을 텐데..."
죽음이라는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철퍼덕 주저앉아서 통곡을 했었지요.
답글
초승달
어린시절의 향수짙은 글이네요
한편의 동화처럼 떠오르는 지난날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어 잘도 표현하셨습니다
탁월한 글솜씨로 맛갈스럽게 써내려간
호기심많았던 누봉님 유년의이야기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답글
디토
답글
눈부신하루
어릴땐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항상 즐거운건 아니죠.
아이의 눈에선 재미있게 보였을 일들(솥단지 닦기, 모줄 맞추기등)이 어른들에겐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의 일부인데도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고 싶어지는 아이의 순진한 눈이 무척 정겹네요.
어른이 된다고 해도 삶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할머니가 되도 이런게 삶이라고 말하긴 힘들것 같아요.
어릴때 보다는 조금씩 더 알아간다는 것 뿐.....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