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자유방임형 교육관을 지닌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왠지 현실에 영합하지않는 멋있고 소신있는 학부모라는 착각을 갖게 했다.
그래서 아이의 일과를 타이트하게 조정하며 매니저를 자칭하는 대치동 엄마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다.
(물론 지금도 그녀들을 동경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아이가 5학년때까지 나의 이러한 소신은 근엄하게 지켜졌고
사실상 방목 하에서 아이는 충분히 자기 의사를 존중받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진짜 이유가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5학년 2학기에 치러진 두 번의 시험에서 난이도가 높아진 수학시험 성적이 바닥을 치자,
나는 불현듯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교육적인 면에서 방관하며 쿨한 엄마인 척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아이의 성적이 기본을 유지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초등학교 4학년에 평생 성적이 결정된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들에 눈길이 가면서
내가 엄마로서, 학부모로서 너무나 무사안일한 태도를 가졌다는 사실을 조금은 인정해야 했다.
물론 그동안 아이는 충분히 자유롭고 행복했을 터이므로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는 없었지만
내가 현실을 직시하고 알 수 없는 위기감에 봉착한 이후에는 전처럼 관대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이 땅의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정말 내가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말들을
호시탐탐 의도적으로 주입시키기에 이르렀다.
"소민아, 엄마가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는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가족과 행복하게 잘살고 싶어서야..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도
남보다 너 낫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자신의 삶과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야.
공부하기 싫으면 펑펑 놀아도 상관 안하겠찌만
네 자신의 퀄리티를 높이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서 공부 했으면 좋겠어."
솔직히 이 정도의 표현은 아이에게 내 속물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완곡한 협박에 불과하다.
먹고 사느라 바빴던 지독히 가난했던 부모님들이 어린 시절의 내게 삶에 대한 아무런 눈높이와 안목을
심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날 - 대개 어떤 이유로든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진 날- 에는
직설적인 협박을 가하기도 한다.
"이담에 네가 멋지고 능력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데 정작 너는 별볼일 없는 여자라면
그토록 멋지고 능력있는 남자들이 너를 선택할까?...
선택은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는 거야.
요즘은 남자들도 영악해져서 예쁘면 다 되는 시대가 아니거든."
그러면서 세상 엄마들의 진부한 한마디로 쐐기를 박는다.
"너 엄마 짝 날래?!"
아직 철없는 딸아이를 붙잡고 아무것도 없는 남자를 만나 직싸게 고생하고 산 세월을 하소연하는 것이
반쯤은 제 살 깎아 먹기이고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어쩌면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현실을 솔직히 드러내 보이며 협박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결국 나의 잔소리들은 아이의 일상에 긴장과 스트레스를 갖게 하는 주도면밀한 협박에 불과할 것이다.
"고만고만하게 살면 어때,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산다는 보장은 없어!"
오래전의 나는 분명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했었다.
발버둥을 친다 해서 삶이 온전히 뜻대로 되는게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면서도,
삶의 가치와 다양성을 여전히 존중하면서도
그렇게 내 안의 이중성과 속물근성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변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은밀하게 숨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전업주부로 살면서 고사리 같은 아이 손을 잡고
시장으로 소극장으로 나들이를 다니며 살던 나름 행복했던 시절에
나는 분명히 삶에 대한 순수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다시 전쟁터로 나오지 않고 전업주부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속하고 있었다면
나의 가치관에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있었을런지 그것도 의문이다.
사실 나는 사회생활을 통해 만나는 많은 고객들을 보면서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신혼집을 반지하 월세방에서 시작하는 사람과
30평대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그들의 생김새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위치의 차이라는 것을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 중의 더러는 물론 부모 잘 만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본인들 스스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도나 표정은 한결 같이 밝고 당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이런 경험의 축적들이 나로 하여금 속물근성을 더욱 고착시키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바닥까지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은 나는 때때로 양심과 싸우며 갈등한다.
어쨌든 삶에 대해 좀더 원대한 이상을 품게 해주지 못하는 내 역량의 한계가 다소 서글프기는 하다.
앞으로도 나는 대범하기 보다 소심한 엄마가 될 확률이 농후하지만,
그래서 아이의 성적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닥달을 해댈지도 모르지만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생산적인 잔소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곧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그렇게 입시와 취업의 관문에 다다를수록
멋진 엄마 되기를 포기하고 쿨한 척 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그저 한숨이 난다...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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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딸딸맘
답글
누봉이
애들이 고딩이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게 되고 닥달할 건 더 치열하게 닥달하게 되는데...
글쎄 어떤 것이 아이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나도 참 헷갈린다...
답글
사라
죽어라 열심히 살고 있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언니는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것임...토닥토닥^^
떰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나? 에 대해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지? 난 자신 없음...돈이 없어 봤기 때문에..더 그런거 같아..지금도 없지만. 처절하게 없어 봤기 때문에...
그래서..미래보장주문..처럼. 아이에게 공부가..돈과 돈이 주는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말했고..우리애는 그걸 신앙처럼 믿고 있는데...양심의 가책은 좀 느낀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도 다 돈을 잘 버는 건 아니지..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것도...딱히 이것이다..라고 말하긴 좀 그렇기도 하고.
나는 그냥.....평생 밥을 먹고 살 수 있을 직업...하나만 올바로 선택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게 그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도..나보다 학생일땐 공부도 못했는데..어찌어찌 직업 하나 꿰 차더니...라고 비아냥거리는 아줌마들을 자주 본다. 직업을 선택하는 안목이..미래를 보는 능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고...오로지 성적순대로 잘 살아야 하고 직업도 가져야하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듯도 하다. 뭐 나도...싸이를 안 하지만 간혹 같은 반이었던 애들..찾아보고 배아팠던 적...왜 없었겠냐...ㅎ 그래서 싸이를 안 한다. 익명인 블로그가 좋더라.
근데 자신 있나? 지금 인기 있는 직종이 우리 애들 컸을 때도 여전히 철밥그릇이어서..밥 먹을 걱정 안 해줄거라고...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그것이 아니라면..미래에 인기 있을 직종에 대해..아이에게..조언해줄 수 있나?
난 항상 걱정이다. 내가 받지 못했던 진로선택에 대한 조언들......
내 아이에게도 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내가 너무 무식해서...미안할 뿐이다. 그러니...공부를 잘 하라고..숨쉴 틈만 남겨 놓고 공부만 하라고..잔소리...하기 싫다.
난 요즘..내가 돈 없는 부모라서....너무 크게 미안하다.
돈 많은 부모였더라면...나는 아이와 함께...이 나라를 떴을 텐데...말이다.
이런 나라...에서 살게 해야 한다니.....큰 절망이다.
남편이 아무리 반대해도...성년이 되면..어떻게든..애를 외국으로 내보낼 생각이다.
공부 잘 해봐야...누군가의 시녀..사냥개 노릇밖에 못 할거면.....그런게 낫지 않을까?
ㅋ...운동하러 가야긋다.........술이 깨도 진심이 나오는구마이~~~
답글
사라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군,
본인 스스로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는 정도면 좋겠다.
머 엄청난 부와 명예와 성공까지 바라기야 하겠냐.
어쨌든 지금의 난, 거리에서 행상을 해도 본인만 행복하고 프라이드를 느끼면 된다던,
그런 순진무구한 가치들을 잃었다는 거지.
우리가 머라 한들, 먼짓을 한들, 결국 지들 인생은 지들이 살게 되겠지만 말이다.
나도 퇴근할란다...어여 가서 나도 운동할란다.
요즘 열씨미 걸으며 도닦는 중인데 깨달음은 언제 오려나~~
좋은 밤 되거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