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사생활 엿보기

글쓴이 SarA

등록일 2009-06-01 14:24

조회수 3,939

글자확대 글자축소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네이버밴드 페이스북 트위터


월요일 - 영어 스터디

화요일 - 탱고 레슨

수요일 - 바이올린 레슨

목요일 - 주1회 맛사지

금요일 - 탱고 레슨

토요일 - 영화보는 날

일요일 - 밀롱가



이상은 지난 1년여간 나의 퇴근 이후 스케줄이다.


탱고와 바이올린은 과거완료형이지만


허리가 완쾌되는 대로 그 빈 시간은 당분간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에서 보내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환상의 스케줄을 가져본 것은 결혼 13년만에 처음이었다.


물론 이런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훌쩍 자란 딸과 구속하지 않는 관대한 성품의 남편과


무엇보다도 집안살림을 도맡아 해주신 친정엄마가 계셨기 때문이다.


4년 가까이 치열하게 살다가 삶에 대한 약간의 여유를 회복하자 극심한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그래서 지난 1년여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 혹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 주저없이 결정하고 실행했다.


마치 고단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처럼 봇물이 터지기도 했거니와


지독한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아이가 어릴 땐 온통 아이를 중심으로 편성된 삶을 살아야 했고,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무렵부터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또다시 나를 위한 인생은 무기한 유보되어야 했다.


남편의 사업 위기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말 그대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던 나에게


직장생활이 자아실현의 도구라는 말은 허세이며 희망고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책임감으로 사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치열한 삶의 격전지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전진만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스트레스,분노,좌절감과 비애, 그러한 일련의 감정들도 사치일 수 있던 시기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직장생활도 온전히 못해보고 결혼에 안주했던 나는,


아이를 셋 쯤 낳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빛고운 앞치마를 두른 채


그 아이들을 위한 간식을 고민하는 나른하고 안이한 일상을 꿈꾸었던 나는,


갑자기 감당하기 버거웠던 현실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삶이 내 이상향으로부터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휘몰아치는 삶의 연속성 때문에 더 힘이 들었던 것 같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주지 못한 남편이 미웠던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쭈쭈바를 입에 물고 시장을 거니는


작고 소박한 욕심이 지켜지지 못한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더 힘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알았다, 몸의 고단함은 마음의 고단함을 결코 추월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마음의 고단함도 시간의 힘 앞에서 무력해진다.


시간의 힘 만큼 우리 삶에 강력한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이따금 집에 들어가기 전 차안에서 핸들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고


이따금 창공을 훨훨 떠다니는 풍선처럼 가벼워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너무도 당당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우뚝 선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고 기특해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환희를 체험했을 때,


나는 삶에 대한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긴 인생을 살아나감에 있어 "절대로" 일방통행은 없다는 것, "반드시" 반대급부가 따른다는 것,


최선은 언제나 또다른 최선을 낳는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만약 남편의 편안한 나무 그늘 아래서 소박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다면


그건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고 행복했을 터이지만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너 정말 멋진 여자야,라고 칭찬하는 순간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유한부인으로 곱게 나이 먹으며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생을 마감해도 나름 행복했을 터이지만,


거친 들판 민들레의 향기와 인생의 깊은 맛은 정녕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체득한 게 있다면


젊은 날의 시련을 통해 훨씬 더 겸허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차라리 젊은 날에 면역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는 게 생각해보면 이 아니 다행이겠느냐고 안위한다면


한차례 폭풍처럼 지나간 시련과 역경이 까짓거 그닥 억울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지금 이렇게 허허 웃으며 관조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 때문이라는 것을.




여하튼 일 년 동안 신나게 자알 놀았다.


올 한 해는 고학년이 된 딸의 학습을 도우며 학부모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 중이다.


원없이 놀았으니 그리 답답증이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나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을 위한 나의 마키아밸리즘은 언제나 정당하며, 그것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마이 페이지 > 스크랩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글에 감사 댓글 남겨주세요.

 담기 인쇄 답글 목록 글쓰기
로그인 후 덧글을 남겨주세요


글수 글수(36,593 )
쓰기
번호 제목 글쓴이등록일조회수
20740   산딸나무 3 현이2009-06-031825
20739   느린 안녕! 7 디토2009-06-031536
20738   저.....외도했어요.. 3 시은맘2009-06-022212
20737   딸의 소망은.... 5 보꽁2009-06-021267
20736   수채화 같은 약모밀 7 현이2009-06-021140
20735   장미가 많이 시들었어요...^^ 3 공룡킹2009-06-021117
20734   진한 핑크 왕 장미 3 현이2009-06-021648
20733   그녀의 사생활 엿보기 12 SarA2009-06-013940
20732   개회나무 3 현이2009-06-011715
20731   6월이네요~~ 4 공룡킹2009-06-011178
20730   엄마의 코고는 소리.. 4 누봉이2009-06-012095
20729   역시 우리엄마 만두가 최고!!! 1 시은맘2009-06-011431
20728   저희 집 가전제품들 이젠 덜덜거리네요 파란 바..2009-05-301465
20727   금계국 현이2009-05-301590
20726   진짜 무서운 올케!!! 10 누봉이2009-05-291962
20725   삶과 죽음의 거리 2 디토2009-05-291628
20724   얘들아, 다 해도 좋은데~ 8 누봉이2009-05-291489
20723   ▶◀ 서울광장에 다녀 왔습니다. 6 roche2009-05-291502
20722   에고..공연연기되었어여.ㅜ.ㅡ 1 시은맘2009-05-291311
20721   이번주 주말은 핫도그와 함께~ ㅋㅋ 1 시은맘2009-05-291242
20720   정선 화엄동굴의 귀여운 도깨비 나라 현이2009-05-294180
20719   나쁜 사마리아인들 12 SarA2009-05-282072
20718   ㅋㅋㅋ 넘 새로워요..ㅎㅎ 2 시은맘2009-05-281372
20717   5월29일 오전 11시 경복궁 2 일마레2009-05-281459
20716   한가할 때 하는 짓 14 SarA2009-05-281777
20715   요즘 홍릉 수목원엘 가면.... 4 현이2009-05-281504
20714   이쁜꽃이 인사하네요!! 1 공룡킹2009-05-281484
20713   여보~~~미안해요!! 2 공룡킹2009-05-281695
20712   미즈, 정말 감사합니다 9 누봉이2009-05-271585
20711   도대체 노무현이 한 게 뭔데? 1 무지개2009-05-271513
20710   놀이터 풍경~ 3 공룡킹2009-05-271379
쓰기
검색 목록보기


이벤트·체험단

기간 ~

쑥쑥플래닛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