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곱살때쯤이었을거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쩍쩍 갈라진 진흙바닥이었다.
그리고 정수리를 쪼아대는 강렬한 햇볕과 갈증이었다
할머니의 회색 뽀뿌링 치마꼬리를 잡고 할아버지와 삼촌이 일하는 논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기억된다.
몹시 목이 말랐다.
징징거린다고 어디서 물 한방울 나올 것도 아니었는데 어서 논으로 가야 떠다놓은 미적지근한 물이라도 마실 수 있건만 당장의 목마른 짜증을 할머니 치마를 마구 휘잡으며 칭얼칭얼 귀찮게 굴고 있었다.
단 한번도 내게 큰소리를 내 본적이 없는 할머니는 대책없이 짜증을 내며 징징거리는 손녀딸을 어찌할 수 없어 '얼른 가자'는 말로 달래고 있었지만 난 더위와 갈증이 모두 할머니 탓인양 마구 짜증을 내 쏟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쩍쩍갈라진 진흙바닥을 걸으며 징징징징 대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문득, '이봐라~ 하이고~' 하며 내 어깨를 돌려세웠다.
논으로 가는 길목, 작은 웅덩이에 보랏빛 연꽃이 하나 활짝 피어있었다.
군더더기없이 오롯하고 선명한 그 연꽃을 보며, 난 정말,,, 알지도 못할 슬픔같은 걸 느꼈다.
아, 그걸 어찌 표현해야 하나? 왠지 가슴 복판이 저리도록 깊이 깊이 슬퍼지는 , 어쩐지 달콤하기도 했던
그 느낌을 ..
왜 슬퍼지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도 연꽃을 보면 왠지 아련하게 슬퍼진다.
그 슬픔의 느낌에서 기억은 끊어졌다.
2. 마을 (당시엔 부락이라고 불렀다) 한 구석엔 내 키만큼이나 커다란 녹슨 드럼통이 있었다
어른들은 그걸 도라무깡이라 불렀고 그래서 당시 아이들도 다 도라무깡이라 불렀던, 비와 세월에 젖어
붉은 녹이 슬어 아이들이 밟고 올라가 텅텅 굴러보는 것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그날 키작은 나를 누가 그 도라무깡에 올려주었던가보다.
지금에야 1m 남짓되는 그 높이가 무에 무서울까마는 당시 나는 아주 커다란 모험을 즐기는 것처럼이나
두려운 흥분에싸여 도라무깡을 조심조심 굴러 텅텅 소리가 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00아~! 이 빌어묵을 년아~ 때되면 들어와서 밥처먹어야지 뭐하고 싸돌아댕겨쌌냐!!!
동네 아낙들은 아이들에게 누구하나 다정하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부끄럼을 타는 듯 다소곳하게 ' 진지드셨쎄유?' 하고 말하는 아낙들이
자식들에게는 욕설을 섞어넣어 왜가리 끓는 소리를 내곤했는데
다들 그렇기때문에 그게 딱히 교양이 있다없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도라무깡에 올라있을때가 바로 집집마다 굴뚝에 안개같은 연기가 올라가고 이집저집에서
왜가리치듯 아이들을 불러모을 무렵이었다.
늦게갔다가는 어김없이 머리통에 꿀밤을 맞는터라 아이들은 우르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할머니가 부르러 오리란것을 알기에, 또 그 푸근한 덩치로 날 안아 내려줄 것을 알기에
잠시 도라무깡에 걸터앉아 할머니를 기다렸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바다 수평선으로부터 피빛노을이 깔리는 것이었다
평소에 보이는 노을은 오렌지와 노랑을 성의없이 섞어놓은 색깔이었는데 , 그날 노을은 아주 진한
붉은 색이었다. 구름까지 빨갛게 물이 들어있었다
오싹 무섬증과 함께 난 또 왠지모를 깊은 슬픔과 소름돋는 외로움으로 눈물을 주륵 흘렸다
겨우 일곱살 계집애였는데, 왜 그런 슬픔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가슴 복판이 저릿하게 퍼져나가는 깊은 느낌. 난 그 느낌을 일곱살때 분명 느끼고 말았다.
나중에 날 안아내리던 할머니가 내 눈물자욱을 보고 '어느 씨중머리가 니를 때렸노?' 하고 광분하셨지만
할머니께 '슬퍼서'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민망해서 할머니의 커다란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인생이라곤 코딱지 만큼도 알지못하는 내가 느꼈던 그 슬픔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지금도 선명하게 보랏빛과 붉은 빛으로 떠올려지는 그 슬픔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3. 할머니곁을 떠나 부모님에게로 가던 길.. 할머니와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나갔다.
읍내에서 부모님 계신곳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야하는데,
내가 도착할무렵 날 마중나올 사람이 있었기에 버스에만 태우면 안전해서 할머니와의 이별은
읍내 완행버스 정류장이었다.
덜컹덜컹 뜀박질을 하는 버스안에서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 할머니도 나도 말이 없었다.
어린 손녀와의 이별은 할머니의 입을 굳게 다물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참을 말없이 가는데 할머니가 창밖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저게 목화꽃이라는기다. 저걸로 옷을 해입는기다'
솜같은 꽃이 밭에 하얗게 깔려있었다. 난 꽃을 잠시 보다가 할머니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의 슬픔은 이유를 분명알고있다. 할머니와의 이별이 너무 슬퍼서, 감당할 수가 없었는데
아무 말이 없다가 뜬금없이 목화꽃을 가리킨 할머니의 젖은 목소리가 드디어 내 울음보를 건드린 것이다.
할머니의 하얀머리카락과 깔깔한 하얀 윗도리, 그리고 하얀 목화꽃...
이별의 색깔은 내게 그렇게 하얀색이다
또미
음,,언니는 감성이..어릴적부터 남달랐던게지..
나도 역시나..그렇게 절절한 이별...색..그런 기억은...잘............없는 것 같았는데..하나 있긴하넴.
시뻘겋게 단풍 든..산..이었는데 말이지..
이건 영원한 이별이라. 아직은 생각에 떠올리기도 싫은..
언젠가는 정리가 되겠지..그땐 덤덤하게 써지려나.........
답글
누봉이
디토
아..빛깔과 관련된 슬픔, 그 섬세한 묘사가 가슴을 울립니다.
내 삶에서 만남과 이별의 색깔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네요.
어린시절의 기억도 마치 일부러 지워버린 듯 뚜렷한 게 별로 없고..누봉이님의 추억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답글
누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