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가 좋아? 내가 좋아?

글쓴이 또미

등록일 2009-03-25 11:23

조회수 1,967

글자확대 글자축소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네이버밴드 페이스북 트위터

살림에 통 관심이 없는 나. 살림도구들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 산 밥그릇, 국그릇 아직 고대로 쓰고, 시집올 때 샀던 냄비며 주전자도 아직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간혹 보험을 들 때, 선물로 밥그릇 국그릇 셋트로 받으면 바꿔 쓰기도 해봤는데, 살림 솜씨 시원찮으니 죄다 짝이 안 맞습니다. 밥 그릇 깨먹고 국그릇 깨먹고 짝지 없는 것들이 한가득이지요.


다행히 스텐레스 좋아하는 울 엄마 덕에 결혼할 때 산 냄비가 죄다 스뎅이었던 것이 다행이었을까요? 십년 가까이 썼건만 손잡이만 좀 눌었지 쓸만은 합니다. 프라이팬은 몇번 바꾸면서 썼지만, 우리 집엔 예쁜 쟁반도 없습니다. 식당 개업할 때 받아온 쟁반, 00식당이라고 써진 그런걸 씁니다.


국자와 뒤집개는 스뎅으로 튼튼하니 고대로 잘 쓰고 있고, 주걱은 밥솥 바꾸면서 딸려온 것들로 사용합니다. 그래도 밥솥 두세번 바꿨는데, 새 주걱이 아직 두 세개나 대기하고 있습니다. 알뜰한 것인지 궁상인것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커피 좋아하는 나. 다행히 커피잔은 좀 있습니다. 마트 갈때 하나씩 슬쩍 집어오기도 하고 커피 좋아한다고 했더니 선물로도 몇개씩 들어오더군요. 뭐 고백하자면, 사실 울 애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유치한 커피잔도 있고 맥심이나 글자가 박힌 사은품 잔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부엌 사정상 손님이 온다고 하면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우리 가족이야 워낙 오랜 전통?이라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손님들은 이런 궁상맞고 조잡한 식기구들을 보며 '부인이 많이 바쁜가? 취향이 독특한가?' 오해하기 좋기 때문이지요. 특히 남편쪽 손님들이 올 때면, 참 난감해집니다.


안주를 담아간 접시가 하필이면 곰돌이 푸가 그려진 접시였던 날. 맥주를 따르던 잔은 *호프집 로고가 왜 그렇게 선명하던지. 향커피를 탔는데 커피잔 수가 모자라 아이 유치원에서 받아온 유치한 잔과 맥심로고가 찍힌 잔까지 다 꺼내고. 그날 남편 보기 정말 미안했습니다.


어쩌다 한번 올 손님때문에 잔이며 접시며 커피잔까지 다 갖추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고 믿고 살았던 나. 내가 바보 되는 건 괜찮은데 나때문에 가족들이 부끄러워지는 건 '아니다'싶은 마음이 들었지요.


남편이 갈치를 유난히 좋아하는 걸 아는 시어머니는, 자갈치에서 갈치를 궤짝으로 사서 손질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몸통부분 통통하게 살 오른 갈치로만 장만했다면서 큰 통 가득 담긴 갈치를 내밀 면서, "생선 굽는 팬 있제? 거기다 소금 살살 뿌리가, 아범 멕이그라." 하시는데.


입이 안 떨어지더군요. 양면팬이 있을 턱이 없지요. 사야겠다고 맘먹고 홈쇼핑 방송을 노려본 적은 많지만, 어쩐지 꼭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시간이 다 된 김에 포기하고 말았었지요. 그래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집 식기구들은 참으로 초라하고 오래되고 온갖 것이 없는 오합지졸들입니다.


명장도 아니면서 오합지졸들 끌고 음식을 하니, 참 그맛도 기막히겠지요? 붓 좋다고 명필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래서 요즘은 여유가 생길 때마다 그릇이나 냄비 같은 걸 하나씩 바꾸고 있습니다. 얼마전엔 냄비를 바꿨습니다. 집에 있던 지저분하고 오래된 것들을 싹 버리고 두 개를 새것으로 구입했습니다. 두 개면 충분할 것 같아서 일단 두 개만 구입한거지요.


처음 써보는 강화유리 냄비를 사 놓고 보니, 그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부엌이 확 살아나는 것 같은 저 자태. 첫 요리를 뭘로 할까 고민을 하다 특별한 김치찌개?를 끓였지요. 어랏, 그런데 물의 양이 좀 많았던건지, 냄비를 타고 넘치는 국물들. 뭐 이것도 특별한 불상사는 아닌데, 남편이 너무 심하게 화를 냅니다.


등을 돌리고 설거지를 하면서말 한마디 안 합니다. "화난나? 에이~머 그걸로 삐지고 그라노~" 발음을 최대한 부드럽게 했는데도 등을 딱 돌리고 쳐다도 안 보네요. 아니, 새 냄비라도 그렇지. 원래 음식하다보면 좀 넘치기도 하고 좀 눌기도 하고 그런거다, 말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남편 성격상 새 냄비엔 그만한 정성?이 곁들여져야 한다고 믿을테니. 그렇지만 나도 섭섭은 합니다. 그깟 냄비, 새냄비 쯤이 십년지기 마누라보다 더 중하단겁니까? 나도 살짝 삐져서 컴터퓨 앞에서 할일 없이 좀 앉아 있었습니다. 에휴, 사는 게 뭔지, 그래도 마음이나 몸이 더 넓은 내가 참아줘야겠다 싶어서 살짝 나가봤더니. 깔끔쟁이 벌써 가스렌지며 냄비 주변 싹 닦아 놓았더군요.


새냄비 하나로 이런 일이 생기는데. 나, 좀 착하고 여성스럽게 변해보고자 식기 재정비를 하려던 계획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하나 바꾸고 나면 새것인 그것 때문에 남편이 나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줄지. 그릇은 그릇인거고 냄비는 냄비인건데.


오합지졸이래도 오랜 벗들인데, 버리지 말고 생이 끝나는 날까지 그냥 동고동락해버려?






마이 페이지 > 스크랩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글에 감사 댓글 남겨주세요.

 담기 인쇄 답글 목록 글쓰기
로그인 후 덧글을 남겨주세요


글수 글수(36,586 )
쓰기
번호 제목 글쓴이등록일조회수
20395   빈준님~~~ 4 메이폴2009-03-271576
20394   내가 졌소 3 금잔디^^..2009-03-271656
20393   벗꽃이 피구 있었어요 2 현이2009-03-271500
20392   메이폴이 사준 담요와 해콩 사진 6 디토2009-03-271642
20391   날씨가 다시 겨울? 1 수지니야..2009-03-271424
20390   금욜이 조아~ 3 금잔디^^..2009-03-271484
20389   내 딸이 말했따... 5 누봉이2009-03-261800
20388   싱글맘 허수경 12 SarA2009-03-262309
20387   가족사진 어디에 두나요? 1 하늘나리..2009-03-261713
20386   해콩이는 웃기는 아이~ 4 디토2009-03-261637
20385   화가 날때는 입을 다물어라. 1 스테파노..2009-03-261508
20384   비가 내려요.... 1 수지니야..2009-03-261475
20383   밝은쪽으로 생각하십시오 1 금잔디^^..2009-03-261276
20382   남편의 긴머리 숨막히네.. 2 도라지꽃..2009-03-262338
20381   지금왔어요 1 송현순2009-03-251219
20380   제 생일 입니다. 13 공룡킹2009-03-251444
20379   봄 바람 살랑 살랑~ 1 지니맘2009-03-251456
20378   올 봄 헤어스타일은 어떤것이 유행인가요?? 3 지니맘2009-03-252219
20377   내 머리가 나빠서^^ 2 하늘나리..2009-03-252441
20376   세 가지 소명 6 디토2009-03-251403
20375   냄비가 좋아? 내가 좋아? 2 또미2009-03-251968
20374   [성명서/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2 메이폴2009-03-252172
20373   야구 졌네요.... 1 수지니야..2009-03-241314
20372   어딜까요..맞춰보세요~ ㅋ 3 일마레2009-03-241269
20371   야구 스릴있네요~~ 2 송현순2009-03-241233
20370   밥 먹으러 갔다가 다리 다쳤네요..ㅋㅋ 3 벼리2009-03-241207
20369   작은 아들 다니는 학교 다녀왔어요^^ 2 하늘나리..2009-03-241137
20368   베란다에서 수상한 냄새가.. 1 숙이2009-03-241400
20367   내게 당신은 사랑입니다 1 금잔디^^..2009-03-241275
20366   조카의 남자 친구 1 금잔디^^..2009-03-231152
20365   공동경비구역 / 그리고 이등병의 편지 4 메이폴2009-03-231411
쓰기
검색 목록보기


이벤트·체험단

기간 ~

쑥쑥플래닛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