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식이는 키가 140cm도 안됐다.
두상이 크고 다리가 짧은 난쟁이 체형이 아닌, 어린아이 체형그대로 성장이 멈춘 상태의 모양새였다.
옥식이는 동네 옥식이었다.
나이가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라했는데 고향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를 아제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갔다 몇년만에 친정이라고 오니까 옥식이만 봐도 반갑더라'
이런식이었다.
옥식이는 동네 걸뱅이었다
옥식이 아버지는 꼽새양반이었고 고향사람들 표현대로 '지랄삥'까지 있어서 생산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옥식이 즈그매는 진마루로 옥식이는 안땀으로 옥식이 동생 영식이는 건너땀으로 구걸을 다녔다고 한다.
'밥 쫌 주이소!'
얻어먹는 주제에 옥식이는 늘 당당했다고 한다.
옥식이 동생 영식이는 바가지에 밥을 담아주면 가는 길에 손으로 허겁지겁 건져먹었는데
옥식이는 얻은 밥을 귀신나오게 생긴 즈그집까지 갖고가서 아버지를 먹였다고 한다.
동네에서 타작을 하면 집집마다 됫박이라도 떠내 옥식이네 양식을 거둬주었는데 물론 다들 가난한 시골살림이라
그것으로 그들 살림은 택도 없었으니 구걸행각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보다못한 우리 친가에서 옥식이와 영식이를 꼴머슴으로 써서 배는 곯지 않게 해주었다고 한다.
옥식이와 영식이가 제법 힘을 쓸 무렵이 되어 구걸을 멈추고 동네머슴이 되었지만
옥식이네는 애 어른 할 것없이 옥식이 영식이라 불렸다
도시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하나 둘 고향을 등졌지만, 옥식이와 영식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꼽새양반이라 불리던 아버지를 묻고 평생 비가림할 마땅한 집없이 살던 어머니를 묻고 나서도
옥식이와 영식이는 고향에 엎드려 땅을 팠다.
가끔 우리 아버지가 고향에가면 옥식이는 고개를 발딱들고 우리 아버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자네 왔는가' 라고 당당하게 악수를 청했다.
주인집 아들이었고 동네 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청년 지도자였던, 허여멀끔 잘생긴 양복쟁이 아버지에게
땅바닥을 끌고 사는 옥식이는 결코 기죽는 법이 없었다.
옥식이 막내동생 봉식이는 도시로 나가 공장에 들어갔다. 옥식이네 집안에서 가장 잘 풀린 케이스였다.
봉식이는 해마다 명절이면 고무장갑 한짝씩이라도 사서 동네사람들에게 돌렸다고 했다.
그것이 고마움에 연유된 것이 아닌, 지난 가난의 설움에 대한 한풀이일지라도
동네사람들의 칭송은 아마 옥식이를 으쓱하게 했을것이다.
옥식이는 평생 총각으로 살았다.
땅뙈기 하나 없이 동네머슴으로, 빼빼말라, 땅바닥에 코를 박을 정도로 키작은 옥식이에게 시집올 여자가 없었으리.
옥식이 나이가 50이 넘자, 동네에서 지레영감이라고 올려 불러주기로 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입에 익은 옥식이라는 이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도 설움많은 고향땅을 끝까지 지키고 있던 키작은 옥식이가
작년에 70의 나이로 죽었다고,,
오늘아침, 둘째 삼촌이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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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 이후 또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정말 행복햇으면 좋겠네요.
답글
이정남
뭐라고 할말이 없어집니다.
옥식이님의 삶에 대한 평을 저라는 사람이 할 수 있을지...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쓸쓸하게 살다간 옥식이님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네요.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어요.
답글
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