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백수되잖아.

글쓴이 밥상차리는 남자

등록일 2009-11-17 10:25

조회수 1,458

글자확대 글자축소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네이버밴드 페이스북 트위터

그제 오후, 제주시에 다녀왔습니다.

변산공동체의 대표인 윤구병선생님이 강연차 오신다길래

1100도로를 넘어 한달음에 달려가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건 10년 전, 변산공동체에서였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고무신.

그와 잘 어울리는 마당의 야생초들. 사진에서 뵌 그대로였지요.


처음 변산을 찾았을 땐 귀농을 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다녀와서 그해 가을엔

다향이랑 정희씨를 데리고 한번 더 방문해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과 농사에 대한 열정으로 몸살을 앓을 때

정희씨가 나지막히 말합니다. "난 농사는 죽어도 못지어요."

그래 귀농에 대한 꿈을 접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공동체를 찾았습니다.

변산을 한마디로 정의내리라면 '소리없는 혁명가들'입니다.

언제나 몇 번을 가봐도 어른들은 많이 힘들지만 아이들에겐

천국인 곳이라 여겨집니다.

그곳을 만들고 오랫동안 이끌었던 윤구병선생님께서 오신다니

반가움이 앞섭니다.

딱히 뵈어야 할 일은 없지만 반가움으로 한라산을 넘었습니다.


1943년생. 연세가 벌써 예순일곱입니다.

하지만 번뜩이는 두 눈은 여전히 세상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습니다.

조금은 졸리운 목소리로 어설픈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 속에

아픔과 해학과 지혜가 녹아내립니다. 강의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너희들은 어릴 때 엄마가 밥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실컷 뛰놀았으면서

왜 너희들의 아이들은 고정된 틀 속에 딱 가둬두느냐?'

그러면서 자율의 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자율! 자율성! 자율성의 힘!

말씀을 들으면서 다향이가 생각납니다.

원없이 실컷 자고, 학교처럼 규율도 없으며 성적도 평가하지 않지만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계절이 바뀌는 때라서 그런지 아침 9시가 넘어야 일어나는 다향이.

(그렇다고 늦게 자는 것도 아닙니다. 저녁 9시에서 10시사이에 자니까)

아침밥 먹고, 양치하고, 세수하면 10시나 10시 30분이 됩니다.

그때부터 피아노 치고, 시 한편 외우고, 그림 좀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을 읽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일어나는대로 자신이 할 만큼만 합니다.

하지만 시를 외우는 건 제 스스로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벌써 2년 째 외우는 것이지만 좋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윤선생님과 막걸리를 진하게 마시고 다시 한라산을 넘습니다.

거금 20,000원을 주고 대리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푹 자고 일어나서 다향이얼굴을 들여다 봅니다.

"아빠, 왜? 왜 자꾸 쳐다 봐?"

"왜? 얼굴 좀 보면 안 되냐?"

"아니. 계속 쳐다보니까 그러지."

"......"

"다향아, 피아노도, 시도, 그림도, 책도 다 집어치우고 실컷 놀아볼래?"

"싫어."

뜻밖의 대답이 나옵니다. 궁금해서 묻습니다.

"아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실컷 놀아보라고. 네가 하고 싶은대로."

"싫어. 그러면 백수돼잖아."

"왜? 백수되면 안돼? 그냥 실컷 놀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되지."

"싫어."


하룻밤이 지나서 다시 떠봅니다.

"어제 아빠가 말한 거 말이야."

"뭐?"

"그냥 하루종일 네가 놀고싶은 대로 노는 거, 생각해 봤어?"

"백수되기 싫다니까."

"백수가 뭔지 알기는 알고 하는 얘기야?"

"응. 지하철역 같은데서 잠자고 얻어먹는 사람들."

ㄲㄲㄲ.

"공부 열심히 한다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고,

실컷 논다고 다 못사는 것도 아니니까 실컷 놀아보라니까.

네가 좋아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말괄양이 삐삐의 저자)선생님도

실컷 놀지 않았더라면 그런 글을 쓰지 못했을 거야."

"알았어, 아빠. 그럼 일주일만 먼저 해볼께."

'그래. 이제 네 스스로 원하는 시스템을 찾아보렴.'

마이 페이지 > 스크랩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글에 감사 댓글 남겨주세요.

 담기 인쇄 답글 목록 글쓰기


글수 글수(36,882 )
쓰기
번호 제목 글쓴이등록일조회수
21943   저의 초2인 아이는 오늘 신종플루 예방접종 한답니다. 3 눈부신하..2009-11-181114
21942   친딸 성폭행한 연하 재혼남 선처 호소한 모정... 9 누봉이2009-11-184390
21941   평택에 농촌체험 하러 가는데 이번주 날씨 좋을까요? 1 김장싫어..2009-11-181318
21940   돈주고 하면 되잖아? 4 밥상차리..2009-11-181501
21939   배봉산엔 산국이 많이 있네요 현이2009-11-181256
21938   친정엄마같은 우리 시엄마^^* 2 깽이2009-11-181640
21937   연산홍이 3 teresung..2009-11-171531
21936   세상에나 벗꽃이 피었더라구요? 3 현이2009-11-171271
21935   또 핸드폰을 바꾼.... 아휴 3 오키도키..2009-11-171232
21934   신종플루 예방백신 접종 3 좋은생각..2009-11-172323
21933   애기가 살짝 기침만해도 겁부터 나는 요즘.. 1 첫눈2009-11-171194
21932   지구 망하는 날..보고 왔습니다. 2 또미2009-11-171571
21931   아이가 이가 뿌러졌어요.. 1 송희수2009-11-171762
21930   오늘은 꽁돈 생긴 날.. 3 물만두2009-11-171447
21929   저희집 깨끗한 달력은요~ 우리집 보더리스 TV 일정관리가 그 비결ㅎ 1 나는야새..2009-11-171456
21928   그러면 백수되잖아. 6 밥상차리..2009-11-171459
21927   눈홍자단 4 현이2009-11-171771
21926   공동 묘지를 찾아 걸었다. 4 시베리아..2009-11-171828
21925   실제커플비교 3 이겨울님..2009-11-171372
21924   잠.. 1 이겨울님..2009-11-161022
21923   하루하루.... 2 현규현서..2009-11-161025
21922   영화 보고 싶을땐.. 1 우리맘2009-11-161338
21921   아이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았으면 좋겠네요~ 1 진정한 ..2009-11-161582
21920   월요병.. 1 전설동화..2009-11-161381
21919   탐폰생리대궁금합니다^^ 2 탐폰궁금..2009-11-161368
21918   트고, 메마른 입술 촉촉하게 관리하는 방법 냐옹냐옹..2009-11-161883
21917   오늘이 올 가을 들어 가장 춥다네여~>-< 1 김태형2009-11-161580
21916   홍릉수목원엔 단풍이.. 2 현이2009-11-161196
21915   취미로 포켓볼을 좀 즐기는데... 1 Mr.짱2009-11-161124
21914   연아경기 기다리며 ) 남편 옷 살려고 하는데 어떤게 더 이뻐요? 3 율양2009-11-161293
    두번째 하나2009-11-171004
쓰기
검색 목록보기


이벤트·체험단

기간 ~

쑥쑥플래닛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