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글쓴이 밝은태양

등록일 2020-08-08 03:44

조회수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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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잊은 지구형제들에게-


 

2장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오늘 아침, “만약 인생이 배움의 과정이라면 왜 이토록 고통스러워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하나로 엮어, 한층 의미 있는 융단을 짜 보고자 합니다.


 


 


 


제가 받은 것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배우기 위해 지구에 왔다면 그 배움이라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렵게 보이는 것일까요? 인생은 자연스러움과 경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어째서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는 할까요?


 


 


 


우리는 위대한 이론들, 즉 우주론적 사실, 희망, 욕구 등에 관한 숱한 사변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여, 결국 우리는 근본적인 하나의 사실에 도달합니다. 즉, 스스로가 가진 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 한 가지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평생 사용해 왔던 ‘방편’들은 결국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과의 의미 깊은 관계도 끝이 나고 언젠가는 혼자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곧 어른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곧 은퇴할 것이고,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늙을 것이며, 아무리 힘이 셀지라도 머지않아 쇠약해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합니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이 탐탁지 않게 여기리라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지도 묻습니다. 예를 들자면 분노나 질투 같은 ‘부정적’ 가정을 없애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여러분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 가지 기발한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방법은 주로 분노를 일으키는 온갖 상황이나 사람들로부터 멀찌감치 달아나거나 질투가 생길 만한 관계를 아예 맺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들은 여러분이 자신에게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자기 인생을 억압합니다. 극단적인 경우, 억압은 도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동굴을 찾거나 집에 틀어박히는 식으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반응을 유발하는 상황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집을 나서거나 산을 내려와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 앞에 누군가 끼어들고 내면의 평화는 분노로 뒤바뀝니다. 도피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여러분은 화를 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자신을 억압해 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얼굴은 가면처럼 돼 버립니다. 늘 똑같은 미소를 머금고 턱은 굳어집니다. 여러분은 계속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만약 긴장을 풀면 울거나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며, 그 밖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의지력을 발휘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억제하려 합니다. 이런 방법이 잠깐은 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는 날엔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어금니를 악물기도 전에 지금까지 억눌려 왔던 바로 그 감정과 두려움을 쏟아 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이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노력과 더불어 여러분은 ‘조종’이라는 훌륭한 속임수도 쓰고 있습니다. 타인으로 인해 힘들어지지 않게끔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바르게 행동해 준다면 여러분은 굳이 그릇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여러분이 질투하지 않도록 연인이 확실하게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화내지 않는 사장을 선택한다면 분노를 해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환경이나 사람을 여러분 임의대로 조작합니다.


 


 


 


물론 다루기 힘든 것은 남겨 놓습니다. 자신의 일부분과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이죠. 여러분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보지 않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옮겨 다니며 자신의 만만한 거울 역할을 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시도는 실패로 그치고 맙니다. 어느 날 홀로 남아, 혼자 힘으로는 자신 안의 이 작은 ‘악마들’을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자, 이제 그 문제를 신에게 맡기자!’ 하지만 그런 문제를 놓고 신에게 한두 번 정도 부탁해 보지 않는 적이 있었던가요? 무엇이 달라졌나요? 드디어 여러분은 이른바 ‘영적 깨달음’이라는 멋진 목표로 옮겨 갑니다.


 


 


 


이로써 ‘깨달음’을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지요. 영혼의 스승을 찾고, ‘올바른’ 책을 모두 읽고, ‘올바른’ 것을 행하며, ‘올바른’ 만트라(붓다의 깨달음이나 서원誓願을 나타내는 말로서 진언眞言, 혹은 신주神呪라고도 합니다.)를 암송합니다. 그로 인해 여러분은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런 과정이 끝날 때쯤에는 신을 발견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부정적인 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원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에 다가가기 위해 이 책을 엮은 메리 마거릿의 경험 한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태평양의 한 작은 섬(하와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다양한 종교 교리를 접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녀는 각양각색의 교리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요. 깊은 궁리 끝에 그녀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이 그 해결책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종교 서적도 없고, 친구도 없고, 스승이나 구루도 없는 오직 자기 혼자뿐인 섬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래 전 그녀가 떠올린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여러분은 외딴섬에 홀로 사는 한 인간이며, 여러분이 읽은 모든 책들과 모든 기도는 텅 빈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근본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수행을 하든, 여러분은 상당 부분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여러분이며, 그것은 수십억 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최종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나’라는 인식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존재 깊은 곳에 간직한 상태라야 질투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경우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질투심이라는 감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에 덫에 걸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 감정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삶은, 질투를 느낄 경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일어나면 자신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으며, 그러니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면의 긴장은 자신의 어느 한 부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내면으로 들어가 자기 존재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서, “나는 질투의 수렁에 빠진 나 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분노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자신을 억압하는 조건 반사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어떤 감정, 어떤 생각, 어떤 행동에 사로잡히든, “나는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진정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에게 없었으면 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평생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요.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들이 일어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그리고 수용이 왜 탈출구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우주론적’관점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수용은 사랑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감정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알려 드리지요.


 


 


 


생각이란 것은 항상 여러분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신을 지나치는 어떤 특정한 생각을 끌어당기기로 선택합니다. 여러분은 늘 익숙한 생각을 끌어당기게 되며, 결국은 계속 같은 길을 반복해서 가게 됩니다. 무가치하고, 두렵고, 우울한 생각과 어둡고 부정적인 사념들이 거듭되는 것이지요.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어올 경우, 그것은 여러분의 물리적 육체 안에서 하나의 감정으로 변형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미래 행동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생각은 ‘저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여러분 뇌를 자극하면 느낌으로 기록됩니다. 그 감정으로부터 여러분은 미래의 행동을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스쳐 가면, 여러분은 그 생각을 끌어당깁니다. 생각은 분노의 감정이 되고, 그리하여 미래의 행위로서 복수가 자리 잡습니다.


 


 


 


여러분은 다양한 영역의 모든 감정들을 경험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감정들의 관찰자임을 깨닫기 위해 지구에 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자신이 끌어들인 생각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기 삶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여러분이 지구에 온 목적이 달성됩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여러분이 끌어들이는 생각들 대부분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어떤 잘못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랑받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과거에 전혀 시도해 보지 않았던 만트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를 진지하고 꾸준히 반복함으로써 지금과는 정반대의 시도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침울함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공격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옮겨 가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할 일은 단지 생각을 바꾸는 것뿐입니다. 그냥 조용히 앉아 어느 순간 자신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면, 고요히 앉아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선언한다면, 존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은 존재의 온기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불꽃’ 또는 ‘불’이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불이 켜지는 차크라(탄트라 요가에서는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연결된 척추 시스템에 영적 에너지와 연결되는 일곱 센터가 있다고 보는데, 이 센터를 차크라라고 합니다.)이 모두가 진실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일으킴으로써 존재에 온기가 더해집니다. 매일 시간을 내어 가만히 앉은 채로, 내가 한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느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질문도 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여러분이 고요히 앉아 따스함, 힘, 경이로움 등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립니다. 수화기를 들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그러자 조금 전에는 없던 감정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일련의 과정이 반복됩니다. 즉, 어떤 생각이 지나가고, 여러분은 그것을 끌어당겨서 반응합니다. 그 반응은 거북하거나 예민한 감정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고 싶어 합니다. 마음은 침투해 온 부정적인 느낌들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지요.


 


 


 


이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고통스런 느낌을 감지하는 순간, 자신에게 “나는 이 느낌을 환영한다. 기꺼이 맞아들인다. 어디로 달아날 필요도 없으며, 바꿀 필요도 없다. 이 느낌은 나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늘 존재했던 따스함이 거친 감정을 향해 움직여 그 주의를 부드럽게 둘러싸고, 그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힘에 의해 언짢은 느낌은 사랑의 힘을 얻게 됩니다. 그 감정은 여러분의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사랑이 이 ‘불쾌한’ 감정 덩어리 위에 쏟아져 그것을 둘러싸고 들어 올려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바꿉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사랑과 비통함 모두를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너무 커서 감싸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사랑의 광대함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감정을 가려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온갖 아픈 기억과 슬픔과 상실감, 후회, 죄의식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가슴속의 사랑은 너무도 거대해서 그 어떤 것이든 감싸 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 감정들은 여러분의 아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여러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을 ‘사생아’ 취급하고 있지요.


 


 


 


다시 말하지만 그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통해, 수용을 통해 이런 감정들을 따스하게 맞을 때야 비로소 변혁, 곧 존재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내면은 광대하기에 무엇이든 감싸 안을 수 있다고 결심하면,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감싸 안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껴안지 못할 정도로 큰 슬픔이나 무서운 사건, 육체적 고통이란 결코 없습니다. 그것들을 따스하게 맞이하십시오. 그들에 대해 가슴을 열어 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기성종교에서도 이웃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앞에 덧붙여 있는 말(자신을 사랑하듯)을 종종 잊습니다. 어느 누구도 기본적으로 타인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 입고서 그들을 사랑하려 해 보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그럴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을 때에도, 여러분은 ‘사랑해 보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훌륭한 일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별 효과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을 원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면서 또 동시에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에게 그 사랑을 주라고 요구하니, 쉽지 않은 것이지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어떤가요?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기는커녕 좋아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사랑해 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사고를 전환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자기 가슴속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거나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하는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놀라운 연금술이 시작되며 전체 상황은 따스함으로 바뀝니다. 이제 여러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으로 인한 모순된 감정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밖에서 애써 찾던 것을 여러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여러분은 비로소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밖에서 사랑과 안전, 평화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하는 순간, 여러분은(타인이 아닌 자신의) 마스터가 됩니다. 동시에 오만이 아니라 경이를 느낄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여러분은 타인을 사랑하는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여러분은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그러고는 요구를 거절당하면 상처 입고, 슬퍼하고, 좌절하지요. 여러분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리하여 내면에 있는 사랑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랑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랑 그 자체가 됩니다.


 


 


 


여러분 앞에 누가 서 있더라도 여러분은 사랑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사랑은 이미 어떤 개체를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가 지나가고, 아이가 지나가고, 낯선 사람이 지나가고, 혹은 원수가 지나가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원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될 때 여러분은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에 애걸하고, 빌고, 거래하고, 조종했던 일들을 여러분 스스로 해결할 때 게임은 종료됩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풍성한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됩니다. 이는 여러분이 타인과 함께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내면에 중심을 둔 존재의 경이로움으로 인해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 줄 수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절망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요.


 


 


 


이런 여정의 초기에는 자신에 관해 사랑스럽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들이 긴 목록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라면, 내가 질투하지 않는다면, 성격이 거칠지 않다면, 이렇게 뚱뚱하지 않다면, 너무 마르지 않았다면...... 나 자신을 사랑할 텐데.’와 같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들이 끝없이 나올 것입니다. 직접 써가면서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것을 모두 꺼내 놓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정반대 방향으로 해 보십시오. ‘내가 화를 내더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이 이전에는 결코 사랑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자신의 ‘추악한’ 부분들을 기꺼이 사랑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수는 자신에게 ‘원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잘못된 무언가가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있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단 하나 잘못이 있다면, 자신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들과 한집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활력적으로 생각하길 원하는 것은 물론,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꾸려 갔으면 하고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감정이라는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감정들은 ‘여러분의 아이들’이기 때문이죠.


 


 


 


감정은 여러분을 구성하는 놀라운 창조물이며 지금의 여러분 그리고 과거의 여러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일부분이지요. 종교는 이 세상에 여러분이 극복해야 할 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춰 본다면, 여러분이 자신의 감정을 사랑할 때 ‘죄’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모든 부분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죽음이 오는 그 순간까지 이런 과정은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매일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창조적이고, 역동적이며, 곧 폭발할 것만 같은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매일 변화하고 있지요. 여러분 존재의 새 부분들이 매일 출현하고, 새로운 경험이 여러분 앞에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두려움, 용기, 유머, 눈물, 분노 등이 끝없이 출몰하는 아름다운 무늬로 삶을 수놓습니다. 정말 경이로운 일이지요. 여러분이 그 무늬를 완벽한 형태로 고착하려는 노력만 그만둔다면, 이들의 조화로운 모습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나 붓다에 대한, 또는 신이 여러분 자신에게 바랄 것이라 여기는 모습에 대한 비현실적인 생각 때문에 자기 자신을 ‘완벽한 형태’로 고정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신까지도 어떤 정형화된 모습으로 만들려고 애쓰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신의 지혜는 그보다 더 뛰어납니다.


 


 


 


신은 항상 움직이고, 늘 변화하고, 진화를 거듭하며, 끝없이 팽창해 나가는, 우리 생각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신이 정말로 따분하게 영원히 혼자 앉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모든 것을 창조해 놓고 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초에 여러분을 낳은 그 능력은 그때도 찬란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창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 그 위대한 힘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완벽하지 않으면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결코 진실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진다면 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시 이 말을 믿었지요. 그래서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본성은 무엇이든 경험하길 원하지만, 경험해야 할 것과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신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인생이 시작할 때부터 전개되어 왔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신이 ‘착한’ 사람들만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믿는 데서 생겨납니다. 자녀가 부모의 일부이듯 여러분 역시 ‘신성한 근원’의 한 부분입니다. 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신성한 근원이 여러분 내면에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미세한 어떤 반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내면에는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어떤 근원, 힘, 실체, 혹은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랑을 느끼려고 할 때마다, 여러분은 그 힘을 증폭시키고, 불꽃이 타오르게 하고, 빛이 들어오게 합니다.


 


 


 


밖에 나가 사랑의 ‘실체’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아이디어, 어떤 생각, 어떤 행위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사랑의 힘을 점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는 사랑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그리고 언제나 여러분 모두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자기 안에 한 그릇의 수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나 붓다의 경우, 그 수프는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강렬한 효능을 지닌 신의 음식이었습니다. 멋진 향기를 풍기는 것은 물론, 그것은 그들의 존재를 데워 주는 불꽃이었기에 그들 스스로가 수프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수프는 그들의 삶에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강한 생동감을 제공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수프는 식은 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자신의 할 일이 단지 불을 붙이는 것임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미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 아침에 침대를 박차고 나와 일하러 가고 싶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바라건대, 말 그대로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 즉 자기 생명의 불을 지피는 일을 하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힘을 주십시오. 내면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하십시오. 스스로를 죽이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추십시오.


 


 


 


여러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여러분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껴안는 내면의 힘, 그것이 바로 신의 사랑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신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신의 일부가 아니었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 신적 자아, 그 영원한 신성은 항상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 신성으로 감싸 안으려 한다면, 신성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신성은 ‘전적인 수용’이라는 넓은 품속에 고통과 두려움을 안아 줄 것이며, 그 품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의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운 적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붓다가 한 번도 아팠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성과 접촉했다고 해서 여러분이 덜 인간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닌 전체성 안에 인간적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여러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부모인 여러분은 자녀들과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들을 껴안고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 안에서 여러분은 자녀들과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자신의 모든 부분에 대한 사랑을 통해 스스로와 하나가 됩니다.


 


 


 


 


본향으로 가는 길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전체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부디,


 


결핍된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그만두십시오.


 


되지 않을 일입니다.


 

[출처] 책)사랑을 잊은 지구형제들에게- 제 2장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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