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시간.

글쓴이 밥상차리는 남자

등록일 2011-01-07 08:39

조회수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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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다섯시. 다향이한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섭니다.

모처럼만에 잡는 운전대의 감각이 조금은 서먹합니다.

정희씨가 출퇴근에 자동차를 사용하면서부터 운전대를 잡을 기회가

적어지고, 그러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증상입니다.


눈발이 날리는 도로를 유영해 갑니다.

눈발이 파도처럼 으르렁거리는 바다를 자동차가 미끄러져 가고,

자동차 안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문득 '얼마 만에 홀로 움직이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해방감이

밀려옵니다. 담배라도 한 개비 피우고 싶어집니다.


결혼 전에는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했었는데

모든 게 변해버렸습니다. 늘 아이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또한 자유롭지 못합니다.

두 여자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온전한 내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눈발이 군무가 점점 더 거칠어지면서 '제주시에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10여 분을 넘기면서 동광오거리쪽으로 빠지는 길과 제주시로

직진하는 갈림길이 눈에 들어오는데 평화로에 자동차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습니다. 순간 망설이다가 동광오거리로 빠집니다.

이미 도로는 눈으로 뒤덮여있고, 조심조심 해서 간다고 해도

두어 시간이 넘게 걸릴 것 같아 집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수업에 가려고 이른 아침에 정희씨를 회사에 출근시켜주었고,

정희씨는 6시 30분 경에 퇴근해서 다향이를 돌봐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향이가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제주시를

넘나들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싫다고 합니다.

그래 다향이를 집에 홀로 남겨두는 보상심리로 낮에는 영화관까지

다녀왔는데 눈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정희씨를 데리러 회사로 갈까? 반찬이 없으니 얼른 집에 가서

만들까?라는 생각으로 퇴근수단을 물으니 직원차를 탄다고 합니다.

그래 마트로 가서 돼지고기 안심과 피망, 버섯, 골뱅이에 맥주도

한병 사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있는 건너방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요놈 봐라.'싶은 생각이 듭니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고 있으라고 했는데 컴퓨터를...


문을 두드리는 대신에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후다닥 달려나오는 다향이. 컴퓨터화면은 바탕화면으로 바뀌어 있고.

갑자기 맥이 빠지면서 상실감이 밀려옵니다. 그래

"다향아, 너 할일이 있었는데 왜 컴퓨터를 사용하고 그래?

그리고 컴퓨터를 사용하고싶으면 이야기를 하지 왜 몰래 해?"

"......"


아빠가 컴퓨터 사용하는 걸 싫어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mp3에 음악을 다운받거나 할 때 아빠가

하지 못하게 했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합니다. 단지 네가 할 일을

한 다음에 갖고놀라고 했지? 했더니 연예인기사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아이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아빠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늘 제 의견을 먼저 물어보며 존중하려고 애를 쓰건만 다향이가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는 생각이 듭니다.

얘기를 나누다가 책상 위를 보니 집을 나서기 전에 컵에 따라준

보이차가 싸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감기기운으로 기침을 하기에 따뜻한 차를 마시라고 내려준 것인데...


소녀시대, 소녀시대, 소녀시대...

기회가 되면 소녀시대 콘서트에 보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다향이의 머릿속은 소녀시대로 가득 차 '배반의 시간'을 잉태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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