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약속을 두 개나 바람맞추고 말았습니다.
윗새오름에 올라 마지막 단풍구경을 하자고 했는데 무릎상태도
좋지 않았고, 그제 점심식사를 함께한 동태아빠님께 커피대접을
하기로 이중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집 근처에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햇던 터라 당연히 집에서 커피를
마실 줄 알았는데 두 곳이나 표를 끊어놔서 그냥 가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선물까지 받은 터라 부족한 책이나마 드리고 싶었고,
그동안 배운 핸드드립커피도 대접하고 싶었지요.
윗새오름에 오르기로 한 분의 전화를 받고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기분이 유쾌했을리 없습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10시 30분, 전화벨이 울립니다.
동태아빠님인가 싶어서 전화를 받았는데 강원도출신의 친구입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제주에 왔다가 자신만 남겨졌다지요. 소싯적에
소설로 등단한 그녀는 조그만 카페를 하나 차렸고, 그곳에 살면서
바닷가도 산책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젊은 여자 홀로 세상을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놈저놈 집적거리고, 건물주는 하룻밤만 자주면 세달치 집세를
받지 않겠다고 치근덕거리다가 새벽에 문을 뜯고 쳐들어와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지요.
그때 여자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자신을 구원해줄 남자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막 사랑의
감정에 빠져있는데 하루는 '10만 원만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
10만 원을 빌려줬는데 그 다음엔 20만 원이 되고, 100만 원이 되고,
나중에는 수 천만 원으로 늘어났다지요. 그래 카페를 운영하면서도
새벽에 어시장에 나가 생선만지는 일을 했답니다.
나중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건 아니다'싶어서 헤어지자고 했더니
조폭인 동생(연애하던 남자의)이 찾아와 온가족을 죽이겠다 협박
해서 어쩔 수 없이 제주를 떠나야 했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인 카페를 헐값에 넘기고, 그나마도 절반밖에 받지
못해 명의를 동업으로 해둔 채 떠나가야 했답니다. 그 카페를 물려
받은 남자도 여자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인간적인
배려를 고마워하기는 커녕 뒤통수를 치고, 거리로 나앉은 그녀를
경제적으로도 힘들게 하며 궁지로 몰았습니다.
제주에서 사귄 남자를 피해 고향인근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곳까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지옥같은 나날을 살다가 이른
새벽에 정처없는 길을 나섰다고 합니다.
동갑내기이고, 글을 쓴다는 공통점으로 친구가 됐던 그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수 년 만에 나타나서 눈물바람을 합니다.
친구를 하기로 했지만 서너 번 밖에 만나지 못했고,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지라 놀라우면서 가슴이 아파옵니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카페로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아픔이 많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토록 심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나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줘야할 것 같아서 동태아빠님께 커피를
대접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다음을 기약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모 문예지에 장편의 글을 보냈다고 하니 꼭 당선돼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글만 쓰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엄청 지루했을
텐데도 잘 참아준 다향이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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