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노릇, 자식노릇.

글쓴이 밥상차리는 남자

등록일 2010-01-30 08:19

조회수 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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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부모님께 전화를 드립니다.

사남매 모두를 혼인시키고 쓸쓸하게 사는 두 분에게

안부전화를 드립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번씩 전화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 무말랭이는 어떻게 만들어야 해요?"

"엄마, 도라지사왔는데 어떻게 만들어햐 돼?"

"고사리는? 씀빠귀는?" 툭하면 물어서 귀찮게 합니다.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요리책이 없어도 인터넷만 열면 레시피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꼭 어머니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건 아니지만 전화를 합니다.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대부분의 시간을 텔레비전앞에서 지내는,

이제 늙고 병들어서 쓸모없게 됐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아직도 당신의 존재가 자식들에게 필요하다는 걸 각인시키기위해서

거의 매일 전화를 드리고, 조리법을 묻습니다.

"엄마, 요즘은 뭐해 드세요? 아, 나도 그거 해먹어야지."

너스레를 떱니다.


대부분은 오후에 장을 보는데 어제는 아침에 마트를 찾았습니다.

정희씨의 은행(농협)심부름을 가다가 같이 있는 마트에 들렀습니다.

마른반찬과 찌개는 있지만 나물반찬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부들부들하고 맛좋은 제주고사리와 매콤새콤하게 무칠 도라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겁니다.

"엄마, 도라지 사왔는데 어떻게 무쳐야 맛있어요?"

"에구, 별 걸 다해먹네!"하면서도 볶아먹을 건지,

고추장으로 무칠 것인지를 묻고, 세세하게 알려줍니다.

"알았어요, 엄마. 고마워요."

"고맙긴. 맛있게 잘 해먹어."

"예, 엄마. 맛있게 무쳐서 보낼 테니 맛좀 보세요."

"그래, 고마워."


아침부터 빨래개키고, 장 봐와서 도라지를 무치고, 고사리를 볶았습니다.

다향이랑 '꼬마 니꼴라'와 '식객(김치전쟁)'을 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전 11시에 피아노수업을 받은 다향이랑 12시 정오에 집을 나섭니다.

영화 두 편을 보고나면 산책할시간이 마땅치 않으니까 영화관에서 집까지

걸어오기로 약속하고, 버스로 이동을 합니다.

준비해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영화를 봅니다.

'꼬마 니꼴라'는 어린아이들의 내면을 잘 그린 그림책같지만

식객(김치전쟁)은 관람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길을 나섭니다. 결코 짧지 않은 길을 걷습니다.

중간, 중간에 다리아프다는 다향이랑 쉬었다가 걷고 또 걷습니다.


바다위로 얼굴을 붉힌 해가 가라앉고, 달과 별이 떠오릅니다.

어둠이 깔린 길을 부녀가 걷습니다. 이야기도 하고, 묵찌빠도 하고,

따로 걷다가 손을 잡고, 손을 잡고 걷다가 저만치 달려가기도 합니다.

목이 마르면 준비해간 귤도 까먹고, 물도 마시면서 걷습니다.

오후 5시 15분에 서귀포월드컵경기장에서 걷기시작했는데

오후 7시 45분에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꼬박 2시간 30분을 걸었습니다.

둘이 지쳐서 집안으로 들어섰는데 식탁위에 메모지가 붙어있습니다.


[점심 잘 먹었어요. 고사리, 도라지 맛있었어요.]

그리고 개수대엔 밥공기 하나란 수저 한벌이 놓여져 있습니다.

다향이랑 내가 영화를 보러 나간 뒤에 정희씨가 밥을 먹으라 다녀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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