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안혜리.김은하.강기헌.김진경.김경빈]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 나오세요.”
서울 개봉동 지역아동센터 박은성 원장은 얼마 전 아침 일찍 전화를 받았다. 공부방에 나오는 현수(9·가명)였다. '혹시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박 원장은 잠깐 당황했다. 이날은 공부방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기로 돼 있었다. 수첩을 확인하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속 시간은 오후 2시였다.
현수는 중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와 우울·불안장애 등 복합적인 심리질환을 앓고 있다. 지난해 중순부터다. 요즘은 증세가 심해졌다. 몇 번씩 일러주고 다짐을 받아도 그뿐이다.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다. 그러더니 엉뚱한 전화를 한 것이다.
현수 부모는 현수가 더 어릴 적에 이혼했다. 엄마가 공장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형(14)과 현수를 키우고 있다. 생활비가 모자라 친척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살아 왔으나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 지원이 끊겼다. 엄마는 더 늦게까지 일한다. 엄마가 올 때까지 현수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다. 이렇게 방치되면서 현수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것이다.
보다 못한 구로구 정신보건센터가 공부방을 통해 현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료비를 지원해줄 테니 현수를 데리고 오세요.”
“한두 번은 지원해줄지 몰라도 그 후엔 결국 내 돈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끝까지 치료받을 돈이 없으니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아요.” (현수 엄마)
서울 소아청소년 광역정신보건센터 이경영 사회복지사는 “정신질환 판정을 받은 아이 부모에게 치료를 지원하겠다고 전화를 해도 열에 아홉은 치료를 거부한다”며 “완치하려면 6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부모들이 월 수십만원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빈곤층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의료 안전망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에 빠진 아이가 많다. 그나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는 의료비 혜택이 있지만 바로 위 저소득층(차상위계층)은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현수네가 그렇다. 금융위기에 몰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다. 하루 벌어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고 어떤 경우는 의지마저 없다. 통상 저소득층 아이들이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데다 부모의 무관심까지 겹쳐 치료 기회마저 놓치고 있다.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가 지난해 저소득층 아동 1만5709명을 검사한 결과 빈곤 아동은 일반 아동에 비해 불안·우울, 비행행동, 공격성 등의 성향을 보이는 비율이 높았다.
서울 창신동 해송지역아동센터 김미아 원장은 “가정에서 방치된 아이들 대부분이 ADHD나 공격 성향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아동학과 김광웅 교수도 “경제위기로 부모의 스트레스가 커지면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이 급속히 전달된다”고 말했다.
윤지(8·가명)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부모 이혼 후 윤지는 아빠·새엄마와 살았다. 그러다 지난해 말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새엄마가 가출하자 그 후 방치됐다. 음주와 도박에 빠진 아빠는 윤지를 전혀 돌보지 않는다. 취재진이 만났을 때 윤지의 옷에는 한 달째 빨지 않아 묵은 때가 앉았고 썩은 이도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지난주 윤지는 공부방 친구들이 “더럽고 냄새가 난다”고 놀리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윤지는 보건소의 심리검사에서 '자살하고 싶다'고 썼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일상을 죽음보다 가혹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유아기의 빈곤은 아동의 언어 발달과 학습능력 사회성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정에서 받은 충격을 완화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지와 같은 아이들의 1차 안전망은 지역아동센터이다. 전국에 3000여 개가 있지만 정부 지원금이 월 200만원 정도밖에 안 돼 운영비를 대기도 빠듯하다. 올해 지역아동센터 예산도 지난해와 크게 차이가 없다. 지난해 말 보건복지가족부가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할 때 윤지와 같은 아이들에 대한 대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특히 저소득층 아동의 정신 건강을 위한 정부 지원 예산은 연간 1억여원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 소아청소년 광역정신보건센터는 지난해까지 외부 후원금으로 저소득층 아동 600명에게 30만~40만원의 치료비를 지원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올해는 지원을 포기했다.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김붕년 교수는 “아이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병세가 악화돼 학업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비행을 저질러 사회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일시적으로라도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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