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 비가 내리네요.
당신 발 젖는 거 싫으니까 마중갈까요?
문자를 보냈는데 답변이 없습니다.
몇 시쯤에 맞춰 나오라고 하면 좋을 텐데 꿩 구워먹은 듯 잠잠합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어휴! 내 팔자야.'
퇴근시간에 맞춰서 오뎅국과 생선조림냄비에 불을 당깁니다.
곧 맛있는 냄새가 퍼지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정희씨가 조금이라도 빨리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인기척이 없습니다.
냄비의 불을 끄고 기다립니다.
배고프다는 다향이한테 말합니다.
"엄마 곧 오실 거니까 같이 먹자."
세 식구 뿐인데도 함께 식사할 시간이 저녁밖에 없습니다.
뻐꾹, 뻐꾹.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8시가 넘어야 끝날 것 같아요.
이런.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전화를 달라고 해도 꼭 이런담.
다향이 저녁밥을 차려줍니다. 7시 40분에 저녁을 차려줍니다.
다이어트한다는 아이를 생각하면 6시 전에 먹이고 싶지만
가족식사를 하루에 한끼 정도는 해야할 것 같아 기다리다가
늦은 시간에 밥을 차려줍니다.
9시가 다 되어 돌아온 정희씨.
내 표정이 굳어 있었는지, 일에 지쳐서인지 아무런 말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습니다.
냄비에 불을 켜놓고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성정이 워낙 무뚝뚝한지라 다섯 살이나 많은 내가 재롱을 부려도
별 반응이 없는 돌부처 같습니다.
그래도 '여자 이창호'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정희씨, 각시라는 말이 듣기 좋다기에
그렇게 낯간지러운 문자를 보냈으면 대꾸라도 하지.
꼭 민원인 대하듯이 사무적인 용건만 문자로 보내기에요?"
"......."
가을비 내리는 밤에 홀로 우는 벌레처럼 외로워집니다.
방문을 닫고 잠자리에 눕습니다.
늘 오손도손 이야기 하고, 재미있는 일을 만들면서 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혼자 노력해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 같이 놀자고 하는데도 짝꿍의 반응이 시원치 않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먼저 일어날까 생각했지만 그냥 누워있기로 합니다.
자정이 넘어서 걸려온 전화라면 정희씨의 전화일 테니 그냥 있습니다.
내가 받으면 '지금 몇 시인 줄 아느냐?'고 화낼 것 같아서 모른체 합니다.
전화를 받은 정희씨가 비틀비틀 옷을 꿰입고 나갑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비상이랍니다.
빗발이 조금 거세다고 새벽 1시에 출근을 시킵니다.
데려다 줄까? 물으려다 그만둡니다.
"데려다 줄래요?" 라고 묻거나 "그러면 고맙지"하면 좋을 텐데
됐다고 할 게 뻔하기 대문입니다.
감귤간벌에, 감귤 솎아주기까지 동원되느라 휴일도 없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 그래도 공무원이 제일 낫다지만
누군가가 공무원시험을 보겠다면 말리고만 싶습니다.
곧 이사를 해야 합니다. 결혼생활 16년 만에 이사를 8번이나 다녔습니다.
이제는 한 곳에 정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떠돌아다니기가 싫은 건 아니고, 이삿짐을 싸고 푸는 게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포장이사는 65만원, 우리가 짐을 싸고 푸는 용달이사는 35만원.
"그냥 (우리가)쌀까?" 하고 정희씨가 묻습니다.
"당신이 (짐)쌀 거면 그렇게 하고, 나한테 시킬 거면 관 두고."
"......" 아무런 말없이 출근하는 정희씨, 집에서 노는 취급하는 각시님.
이사를 갑니다.
그런데 옆 집도 하나 더 빌려서 올레게스트하우스를 하자고 합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돌보느라 글감을 잡아놓고도 개점휴업 중인데
게스트하우스까지 운영하라고 합니다.
게스트하우스를 하자고 하지만 결국은 내게 하라는 말입니다.
온종일 아이랑 함께 하면서 하루 세끼 밥 차리고, 설거지 하고,
빨래하고, 장봐와서 반찬 만드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한데
옆 집의 청소와 이불빨래까지도 도맡아하라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땅이 나왔습니다. 작고 소박한 집도 있습니다.
감귤밭 속의 오두막인데 멀리 중문바다와 용머리해안도 보입니다.
아이랑 같이 강아지 키우고, 과일나무도 심고, 텃밭을 가꾸면서
살기엔 그만입니다. 글작업을 하기에도 더할나위가 없습니다.
재밌는 공간에서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찻집을 운영하면 어떨까?
그런 용도라면 제격입니다. 20년만 채우고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정희씨의 퇴직이후의 소일거리도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정희씨가 반대합니다. 생활권이 아니라서 안 된다고 합니다.
생할권의 범위를 물으니 걸어서 출퇴근을 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동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니까 차를 가지고 다니라 했더니
자신은 운전하기가 싫다고 합니다.
(세상에 운전하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을까요?)
설렁설렁 걸어가도 중문시내까지 30분이면 충분한데 멀다고 합니다.
3년 뒤에 집을 되팔 수 있을까? 를 걱정합니다.
땅(집)을 산다는 건 다향이보다 자신에게 무게를 둔다는 것인데
상황파악을 하지 못합니다. 일하는 건 힘겨워 하고,
살림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자는 것인데
엉뚱한 말을 합니다.
왜 3년 뒤에 집을 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3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살림살이나 기타의 조건들이
지금과 똑같다고 가정하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3년 뒤면 우리에게도 별장이 하나 생긴다' 건 꿈도 꾸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도자기를 만드는 곳에서 물어보았습니다.
물레가 얼마나 하는지? 제일 작은 전기가마가 얼마나 하는지?
합해서 7-8백만 원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고로 하면 더 싸진다지만 정희씨가 2-30년 갖고 놀 걸 중고로
구입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혼에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장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그랬더니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원한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첫 손에 꼽은 게 바로 자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난 아직도 그런 말들과 약속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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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하루
감귤밭속의 오두막집이라.... 생각만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런곳에서 저도 우리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고 싶네요^^
답글
밥상차리는 남자
내가 아무리 원해도 짝꿍이 반대하면
그만이지요.
마음이 허허롭지만 또 비워야 할 때입니다.
누봉이
게스트 하우스....좋은데...
하긴 그렇다면 글쓰기엔 무리가 따르겠네요..
하지만 일하는 사람두고 양립하면 안될까요?
올레게스트하우스... 멋집니다...
답글
밥상차리는 남자
게스트하우스, 펜션 모두 인건비 따먹기입니다.
월급을 줘가면서 운영해서는 타산이 맞질 않지요.
이래저래 깊어가는 가을처럼 고민만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