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이 지난 지금도 눈 앞에 아른거리네요.
성큼성큼 무대를 가로질러 당차게 걸어나오던 키신의 모습.
환호성과 박수를 쏟아내던 객석은 그가 피아노 의자에 앉으려고
연미복의 꼬리를 등 뒤로 펄럭이는 순간부터 숨을 멈추었죠.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시작.
'몬태규 가와 캐퓰릿 가'에서 콘서트홀의 천장으로 잠시 눈길을 돌렸다가
쾅! 하는 소리에 저 아래 1층 객석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절제된 연주에 익숙해져 있던 제 귀는 키신의 포르티시모가
콘서트홀에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상상도 못했던 것이죠.
아무리 마음 속으로 준비를 하고 기다려도 저음부의 옥타브가 울릴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한 순간에 듣는 이를 무력하게 만들어 사로잡는 마력을 지닌
소리였답니다.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8번. 거듭 반복해서 들어왔건만 1악장은
여전히 생소하고 어려웠어요. 그래서 피아노 건반과 키신의 옆모습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머지 악장의 절반 동안은
눈을 감거나 공연장의 풍경을 찬찬히 훑어보며 들었지요.
물론 열정적인 악구와 더불어 격해지는 몸의 움직임, 연주 도중 머리를
넘긴다거나 손을 터는 행동 등과 같이 감상에 또 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더하는 요소들을 놓치게 된다할지라도, 하나의 감각에 집중할 때 오히려
쉽게 음악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의 연주회나 영상물을 통해
이미 경험한 바 있으니까요. 음반과 DVD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임장감이 깃든 음악을 듣고 싶었거든요.
손가락의 현란한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겨 귀가 닫히려고 할 때마다
질끈 눈을 감으면 신기하게도 귀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해서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해서 낭만과 슬픔을 머금은 2악장,
프로코피에프 특유의 율동감이 살아 있는 3악장에 빠져들 수 있었답니다.
쇼팽의 작품으로만 꾸며진 2부가 시작되자 피아노를 둘러싼 공기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흡사 연인에게 편지를 쓰듯, 키신은 사랑과
존경을 담아 한 음 한 음을 정성스레 피워올리며 선율을 노래했지요.
항상 들어오던 연습곡에서 이런 깊은 감성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요.
호수 위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바람같은 왼손,
작은 새처럼 아름답게 지저귀는 오른손,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눈길로 음악을 바라보는 연주자. (Etude op.25-5를 들으며.)
키신이 연주하는 쇼팽을 듣고 있으니 푸른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에
기대고 앉아 시화집이라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마지막 음의 잔향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그가 퇴장한 뒤에도 끊이지 않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무더운 여름날에 쏟아지는 시원스런 소나기를 떠올린 건,
아마 그가 던진 주술에 걸려 공연장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기
때문이었겠죠...
키신은 무대 위로 돌아올 때마다 미소를 띤 얼굴로 몸을 굽혀 자신을 향한
찬사에 정중히 답례했어요. 그렇게 커튼콜과 앙코르가 수 차례 이어지던 중
그와 우리가 서로 감정을 교류하고 있다는 느낌,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다가오던 때가 있었는데, 너무도 생생한 경험이라
혼자서 백일몽이라도 꾼 건가 싶었답니다. (나중에 기획사 게시판에 올라온
공연 후기들을 읽고 나서야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란 걸 알게 됐죠.)
열 번째 앙코르를 마지막으로 키신은 작별 인사를 했어요.
가슴에 올린 손.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데워주는 더없이 따뜻한 몸짓.
세 시간이 넘는 음악 선물을 안겨주고도 팬들을 만나기 위해 싸인회에
참석한 그에게 저는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그대로 전했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쇼팽은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예브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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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니
직접 봤으면...
순간순간의 전율을 그대로 느꼈겠구나 싶어 부럽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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