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안녕!

글쓴이 디토

등록일 2009-06-03 12:06

조회수 1,607

글자확대 글자축소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네이버밴드 페이스북 트위터

어제 밤은 무섭게 바람이 불었습니다.

창으로 부는 바람 소리가 공포영화 속의 음향이었네요.

아침 일찍 내다본 바깥 풍경은 어둑한 회색 하늘 아래

나무들이 몸살 하듯 이리저리 뒤채고 있습니다.

 

어제는 해민이 놀이 치료를 마치고 여름 샌들을 사러 갔습니다.

하얀 색에 곰돌이 얼굴이 있는 샌들을 사서 신기니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앙증맞은 샌들을 신은 아이는

신이 나서 쫓아다닙니다.

해민이가 30개월 되기 전엔 아이의 신발을 차마 사주지 못했네요.

신발을 사주면 떠난다는 미신......
해민이의 첫 운동화, 샌들, 두 번째 운동화 모두 할머니가 사주셨지요.

이제 미신적인 두려움은 아이의 생후 30개월이 지나며 사라졌나 봅니다.

자꾸 민이와 연관해서 해민이를 바라보는 버릇은 참 오래 갈 것 같네요.

 

놀이 치료에서 해민이는 서서히 달라집니다.

어제는 놀이실에서 내가 신문을 꺼내 들고 읽자 아이는 불안한 듯

자꾸 엄마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엄마가 신문 보는 거 싫어?’하고 물으니

‘응’하고 말합니다.

신문을 치우고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안심한 듯

다시 이것저것 탐색하고 놉니다.

 

어제 처음으로 모래를 바닥에 던지거나

물건으로 이것저것 바닥을 치는 과격한 행동을 보인 것은

공격성 표출단계로 아이가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상호작용 놀이로 이어진다고 해요.

지금도 조금씩 교사와 소통하고 관심을 보이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해민이를 데리고 여름 바지 하나 사고 신발 사서 신기고 하는

이런 작은 일상이 내겐 기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순간순간 확인하는 것……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공선옥씨가 말한

‘우리의 인생에는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나누어지는 순간이 꼭 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며 삽니다.

이제 미로처럼 보이던 삶이 고속도로처럼 쭉 뻗어 있습니다.

탄탄대로란 뜻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에게로 끝없이 향하는 삶,

민이는 선함, 부드러움, 아름다움의 표징처럼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의 말처럼 ‘삶의 밑그림은 슬픔’이란 것도 이젠 분명히 압니다.

아무리 덧칠을 하려 해도, 도망가려 해도

기본을 망각하면 제자리 걸음이지요.

 

지금까지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에 이토록 가슴 아픈 건

언론의 몇 마디 말만 가지고 그를 함부로 평가한 나 역시 가해자라는 자책,

그를 못 박으라고 소리친 잔인한 군중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는 생각,

사실로 여겨진 것들 이면에 자리한 ‘진실’을 보지 못했던 내 까막눈,

이런 것에 대한 쓰라린 죄책감이 한몫 하고 있습니다.

애도의 과정은 파도 타기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하며

끊임없이 털어놓고, 반복하고 되새겨야 하는 거지요.

 

아이와 함께 하는 자잘한 일상들이 정말 눈물의 모자이크처럼

웃음과 슬픔으로 새겨지나 봅니다.

한겨레 신문 상담실의 임경선씨 조언대로

이 슬픔에 ‘느린 안녕’을 고하렵니다.

슬로우 굿바이!

 

마이 페이지 > 스크랩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글에 감사 댓글 남겨주세요.

 담기 인쇄 답글 목록 글쓰기
로그인 후 덧글을 남겨주세요


글수 글수(36,872 )
쓰기
번호 제목 글쓴이등록일조회수
20771   울집에 온 손님~~ 7 공룡킹2009-06-111362
20770   일등 며느리 4 만석2009-06-101525
20769   시은이 간식 생겼어요..ㅎㅎㅎㅎ 4 시은맘2009-06-101299
20768   수요일 오후~~ 1 공룡킹2009-06-101336
20767   환상의 패랭이꽃 2 현이2009-06-101392
20766   고부 갈등의 원인은 모성애 결핍이다 4 디토2009-06-104508
20765   여러분도 조심하세요... 9 누봉이2009-06-101885
20764   올여름 패션트랜드는 뭘까요.. 2 전경화2009-06-091897
20763   무심코 태우는 유모차가 아동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라네요 1 선정훈2009-06-091443
20762   바람만 많이 불고 흐리네요 햇살바람..2009-06-091283
20761   잠시 옛 생각에~~ 2 공룡킹2009-06-091335
20760   33살 백수 힘들군요. 5 바보2009-06-092724
20759   아들이랑 라면 먹어요~ 4 공룡킹2009-06-091312
20758   그녀의 오빠가 되어버린 내 아들 6 만석2009-06-091457
20757   시어머니 되기! 9 제비꽃2009-06-091524
20756   퀴즈풀고왔어요 1 숙이2009-06-091029
20755   월요일 힘차게 시작해 보아요...^^ 2 공룡킹2009-06-081345
20754   공연보고~ 대학로에서 놀고~★ 3 시은맘2009-06-081441
20753   안녕! 핫도그 보고왔어요..^__^ 시은맘2009-06-081391
20752   그쯤 놀래켰으면 정신차렸을거예요 5 누봉이2009-06-081641
20751   시간의 정원에서- 이혼 후의 만남 3 디토2009-06-071571
20750   아들의 작품이~~ㅎㅎ 2 공룡킹2009-06-071288
20749   어제 저녁 밥상은 고기로~~ 3 공룡킹2009-06-071228
20748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셨어요? 5 공룡킹2009-06-061189
20747   엉겅퀴 1 현이2009-06-061263
20746   우리 치카치카 해요~~ 5 공룡킹2009-06-051095
20745   좋은인연 송현순2009-06-051343
20744   시립대 캠퍼스에서 1 현이2009-06-051973
20743   사색 패랭이꽃 3 현이2009-06-041378
20742   날씨가 넘 좋은데요~~ 1 공룡킹2009-06-041103
20741   문제는 그게 아닌데... -.-;; 10 누봉이2009-06-031670
쓰기
검색 목록보기


이벤트·체험단

기간 ~

쑥쑥플래닛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