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을 깨닫고 조금씩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이젠 제법 많아졌다. 슬로 푸드ㆍ슬로 워킹 등 '슬로(slow)'를 기본 전제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슬로 시티'라는 말은 들어 보았는지? 삶의 여유로움에 가치를 두고 느리게 사는 행복한 마을은 국제적으로 '슬로 시티' 인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다.
슬로 시티는 어떤 모습일까.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사는 곳, 직장생활에 지칠 때 가끔은 떠나고 싶은 곳, 그곳 슬로 시티가 어떤 곳인지 만나 보자.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 슬로 시티 운동
현대는 속도의 시대다. 빠름이 미덕이자 목적이고, 느림은 퇴보이자 모자람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름과 느림의 길항 관계에서 전자를 선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무게추를 '속도'가 아닌 '가치'에 둔다면 선택은 달라진다. 이 경우 빠름은 자신을 옥죄는 속박으로, 느림은 여유로운 행복으로 바뀐다.
한여름 폭우를 예고하는 가랑비가 내리는 날 푸른 잎사귀 밑에서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달팽이도 결국은 소낙비를 피할 안식처에 닿고, 넓은 논물에 발을 담근 채 한 포기 두 포기 천천히 모심기를 하는 농부의 우직하리만큼 느린 몸놀림도 해질녘쯤이면 파릇파릇한 모가 논 전체를 다 덮고 허리를 펴게 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느림의 미학이 요구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막 소나기를 피한 달팽이의 작은 안식처, 드넓은 논물에 모심기를 방금 끝낸 농부의 뿌듯한 속내는 바로 행복감이라 할 수 있다.
매캐한 매연 속을 질주하는 자동차와 회색 빌딩 숲, 째깍거리는 벽시계의 초침소리에 자동인형처럼 자신을 닦달하게 되는, 조급한 도심의 일상을 지양하고 공해 없는 환경 속에서 고유의 먹을거리와 문화를 향유하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삶이 바로 ‘슬로 시티(Slow City)' 운동'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항상 무엇인가에 떠밀리듯 사는 바쁜 도시생활을 반성하고 획일적인 문명의 이기를 떠나 자연과 이웃을 벗삼아 행복한 삶을 누려 보자는 슬로 시티 운동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키안티 지역의 ‘그레베'가 진원지이다. 1999년 당시 그레베 시장이었던 파울로 사뚜르니니가 “빨리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의 삶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임을 주장하며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 시작됐다.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을 주제로 천천히, 느긋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임을 주창한 슬로 시티 운동은 곧장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으면서 유럽으로 퍼져 갔고, 이어 지난 2006년 12월,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 장흥군 유치면의 반월 마을,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가 이 운동에 동참, 슬로 시티로 지정됐다.
느긋이, 더디게 사는 삶의 현장, 한국의 슬로 시티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은 전통 돌담과 한과ㆍ쌀엿 등 전통 먹을거리가 예부터 이어져 왔음을, 장흥군 유치면 반월마을은 청정 표고버섯, 생태농업 방식의 장수풍뎅이 사육, 전통방식의 장 담그기를, 완도군 청산도는 다랭이논ㆍ구들장논ㆍ해녀 등의 전통생활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신안군 증도는 재래식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과 자전거를 이용한 친환경 교통시스템을 슬로 시티 인증을 위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
1900년대 초 지어진 11가구 20여 동의 전통한옥이 고색창연한 멋을 풍기는 삼지천은 창평면의 중심 마을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당에 서서 보기만 해도 정겨움이 묻어 나는 전통한옥들은 전형적인 남도의 주거양식을 갖고 있다. 눈높이에 맞는 나지막한 돌담길을 사이에 두고 집집마다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는 감나무와 대나무들이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산봉우리가 각각의 소실점이 되면서 원근감이 살아나는 삼지천 마을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고재선 가옥을 비롯한 문화재급과 지방민속자료인 가옥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어 예스런 정취를 물씬 풍긴다.
이런 조건에 걸맞게 삼지천마을은 딸기ㆍ토마토ㆍ고추ㆍ포도 등 계절 특산물과 쌀ㆍ보리ㆍ참깨ㆍ마늘 등 중요 농작물을 연중 재배할 뿐 아니라 그 수확물로 전통 쌀엿과 한과, 죽염된장 등 특산품을 생산하고 있어 농가수익성 또한 어느 농촌 마을보다 높은 것이 특징이다.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의 ‘느림의 미학'을 대표하는 돌담길(왼쪽).
높게 자란 감나무 꼭대기에 지어진 까치집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의 소담한 풍경이 그려진다(오른쪽).
그래서인지 주민 대부분이 70세를 넘는 고령임에도 건강하고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흔적이 두루 있고 식영정과 소쇄원 등 문화유적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 장흥군 유치면 반월 마을
장흥댐 최상류에 있는 이 마을은 38개의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전형적인 초록 산골이다. 표고버섯과 버려진 표고버섯 자목을 이용해 키우는 장수풍뎅이가 주 소득원인 이 마을은 주위 환경만 봐도 ‘자연으로의 회귀' 또는 ‘느림의 미학'이 절로 실천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마을 앞에 흐르는 맑은 물이 냇가를 이루고 그 속에는 가재와 다슬기가 오염 없이 자생하며, 자연에 대해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이웃을 이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순수 무공해의 표고버섯이 이슬을 머금고 자라나고 그 옆에선 장수풍뎅이 애벌레들이 밤마다 비상(飛翔)을 꿈꾼다. 이 애벌레들의 꿈은 매년 열리는 장수풍뎅이 축제 때 동심의 세계와 조우하고 있으며 어른들에게도 잃어버린 추억의 편린들을 되새겨 주는 역할을 한다.

장흥군 유치면 반월 마을(왼쪽)은 마을이 들어선 환경만 봐도 '느림의 미학'이 절로 느껴진다.
장수풍뎅이(오른쪽)은 이 마을의 주 소득원.
▷ 완도군 청산도
“이 년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 유봉, 동호가 진도아리랑을 주고 받으며 어깨춤을 덩실대며 걸어내려 오던 황톳길은 청산도 당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나지막한 돌담이 어지러이 쌓여 있고 그 너머 구들장논엔 청보리가 익어간다.
청산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중심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주민은 약 3,000명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청산도는 길가 돌담이 섬 언덕을 향해 구불구불 치닫는 사이사이로 봄이면 청보리와 유채꽃이 자수(刺繡)처럼 번지는 보석 같은 섬으로 잘 보존된 돌담, 척박한 섬 비탈을 일군 계단식 다랭이논과 구들장논(구들을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논), 섬 곳곳에 피어나는 노란 유채가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느림의 삶을 살아 볼 만한 유혹을 던진다.
특히 어디서나 푸른 하늘빛과 쪽빛 바다색이 어울려 그 속에서 향토색 짙은 삶을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순박한 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청산도의 명물 계단식 다랭이논과 구들장논.
논의 바닥에 마치 구들장처럼 넓은 돌을 깔아, 비가 오면 위에 있는 논부터 물이 고여 아래 논으로 내려간다.
옛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 신안군 증도
초여름인 6월 현재 증도는 하얀 소금 꽃이 느림의 미학을 오롯이 담아 한창 꽃을 피울 때다. 따가운 햇살을 등에 업고 힘든 고무래질로 염전을 훑으면 하얀 천일염이 뛰어난 맛을 담아 수북하게 쌓여 가는 태평염전은 갯벌 3km에 걸쳐 펼쳐진 증도의 대표적인 풍광이다.
4월부터 10월까지 바닷물을 끌어들여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은 60여 개의 소금창고 행렬과 더불어 염부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는 1일 염부가 되어 뙤약볕아래에서 등짝이 까지도록 물수레를 밟아 보아도 좋다. 그 힘든 노동이 여태까지 나의 바빴던 삶의 궤적을 되돌아볼 계기를 줄 수 있다면 헛수고만은 아닐 것이다. 증도에서는 ‘웰빙' 개념이 단순히 잘 먹고 잘살자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되돌아볼 시간을 갖는 여유로움까지 확장되고 있다.
또한 태평염전의 서쪽 끝 방파제와 광활하게 펼쳐진 찰진 갯벌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질퍽한 갯벌에는 남도갯벌의 진객인 짱뚱어가 앞 지느러미로 뛰어다니는 광경이 목격되며 갯벌의 마른 자리엔 함초가 자란다. 함초는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해초로 증도 천일염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6월이면 염부들의 고무래질로 순백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증도의 태평염전(왼쪽).
함초는 증도 천일염의 재료가 된다(오른쪽).
<슬로 시티 충족 요건>
슬로 시티 국제연맹으로부터 인증받기 위해서는 다음 12가지 조건 중 몇 가지 조건에 부합되어야 한다.
1. 인구 5만 명 이하의 중소도시
2. 전통 수공업과 조리법 장려
3. 자연친화적 농법과 대체에너지 등 환경친화적 에너지 개발
4. 마을 광장 네온사인 없애기
5. 문화유산 지키기
6. 부분적인 차량통제
7. 자전거길 만들기
8. 나무 심기
9. 경적 등 소음 줄이기
10. 주민들의 의견 수렴
11. 글로벌 브랜드의 대형 체인점 거부
12. 패스트푸드와 유전자 변형 음식 거부






> 


최신
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