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한 나!
누가 봐도 정말 이른 결혼 이었고 딸 셋의 장녀였던 나지만 부모님의 걱정과 실망도 참 크셨던 것 같다.
학교때부터 나름대로 공부도 잘 해왔고 대학도 한 번에 진학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나지만 그 때는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이 내게 영원한 행복을 안겨줄 거라 믿었고 그래서 결정한 결과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편이 대학때부터 서울서 자취를 해 왔고 시댁이 지방이라 신혼살림은 친정가까이에서 차릴 수 있었던 점이다. 그래서 더 난 결혼 후에도 별 어려움 없이 내 삶을 즐기며 살고 있었는데 덕컥 예상치도 않게 큰 아이가 생겼다. 한창 임용고시 준비도 하고 있었고 나름 이것저것 별려놓은 일도 많았던 나에겐 정말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래도 이미 생겨버린 생명체를 어찌할 수 없었기에 난 낳기로 결심하고 늘 하더대로의 생활도 이어갔지만 내 몸은 임신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그리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남보다 유난히 유별난 7개월이라는 입덧기간과 임신후기때의 두드러기, 막달에 아이머리가 엉치뼈에 걸쳐서 누군가의 부축이 없인 걷지 못하는 상황 등 정말 남들 하나 한다는 고생은 모두다 한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잘 가서 2000년 1월 31일 첫 아이를 온갖 산고끝에 운 좋게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누구나 엄마라면 다 느끼는 모성애의 뿌듯함을 안고 나의 육아기는 시작되었다.
남들이 다 뱃속에 있을 때가 낳았을 때보다 훨 좋을 거란 말들을 했지만 난 별 걱정이 되진 않았었다.
다만 아이를 누군가가 키워줄 수 없었기에 내가 하던 공부와 일들을 당장 그만두어야했다.
친정엄마께 부탁도 드려보았지만 엄마께서는 나름대로 지역에서 봉사활동과 단체장 활동등으로 바쁘신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난 나중에 또 하면 된다는 생각에 모든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들어앉았다. 그리고 처음 몇달은 정말 아이만 보고 사는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아이도 넘 사랑스러웠고...
그러다 차츰 나에게 소위 우울증이라는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건 아이가 돌을 넘기면서부터였다.
친구들은 그 제서야 하나둘 시집을 가고 나름대로의 직업도 갖춘 상황이었는에 난 이른 나이에 엄마라는 타이틀만 얻었을 뿐 아무것도 이루어놓은게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 내가 살고 있는 당시의 삶이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멀게만 느껴졌다. 결혼생활도 3년차로 접어드니 남편과도 싸움이 잦아졋고 점차 아이에게 여러가지로 해 주고 싶은 것들도 많아지면서 경제적으로도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사실 남편은 대학원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기에 딱히 고정수입이 없었다. 강의료와 가끔하는 알바비 정도,..다행히 시댁에서 아이낳고는 약간의 생활비를 보태주시긴 했지만 그리 넉넉지 않았다. 다만 당시 먹는 것과 여러가지로 친정에서 많이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그리 크게 어렵다는 걸 느끼진 못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우울증이라는 걸 앓게 되면서 난 아이를 어떻게든 떼어내고 내 일과 공부를 다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일이라는게 맘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내가 바라던 대로 일이 잘 되지 않을 조짐이었는지 아이가 갑자기 발바닥에 무슨 염증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작은 종양같은 거였지만 내겐 꼭 내가 나쁜 생각을 해서 받게된 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퇴원을 하고 난 당분간 일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했다.
오로지 아이만을 위해서 모든 내 시간을 쓰기로 맘을 먹었다.
그리고 서서히 때이른 결혼 생활도 자리잡아가기 시작하고 남편도 학교에 가는 것이 어려워지자 취직을 하고 그럭저럭 한 가정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4년이라는 결혼생활이 지났는데 첫 애가 딸인 나에게 시댁에서 둘째를 아들로 꼭 낳아야 된다는 나름의 압박이 오기 시작했다. 경상도라는 지방적 특성도 무시할 순 없었지만 내 주변 사람들 모두 둘째를 어서 낳아야지 하는 시선들이 참 많았다. 허나 난 임신이라는 고통을 아직 잊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제 조금만 참으면 내 삶을 되찾을 수 있는 때였기에 그리 쉽게 둘째임신을 결정하지 못했었다.
허나 나 빼고 모든이들이 바라는 일이니 언제까지나 버틸 수 만도 없었고 결국 늦은 둘째를 임신했다.
그리고 2005년 큰 아이와 5살이라는 적지않은 터울로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솔직히 둘째를 임신하고서 얼마나 아들이기를 바랬었는지.......물론 딸도 좋지만 그래도 난 둘째를 끝으로 출산이라는 경험을 마치기를 바랬었다. 딸이면 어쩔 수 없이 또 낳아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난 아들이기를 기대했었는데 삼신할미도 도우셔서 다행히 난 아이는 둘로 마감할 수 있었다.
이제 난 어엿한 대한민국 평범한 전업주부의 모습을 갖췄다.
아이 둘에 직장생활하는 남편과 작지만 소중한 내 집도 있고 나름대로 행복이라는 기본 조건은 갖추게 된 것이다. 어느새 아이들은 자라서 큰 아인 초등 2학년이고 작은 아인 4살이 되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을 못 되지만 그래도 남에게 손 빌리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가정의 모습속에서 가끔은 행복이라는 단어도 떠올린다.
다만 내가 지금의 살아가는 삶속에서 가장 행복하구나를 느끼면서 저절로 미소짓게 되는 순간은 누구나가 제 1순위로 뽑겠지만 당연히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이다. 그것도 아이들이 내게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커다란 웃음을 안겨줄 때...
가끔 큰 아이가 조금 컸다고 속상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때는 작은 아이가 대신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배부르다는 자식들의 모습이 이젠 정말 이해가 된다.
올 11월 1일이 되면 만으로 딱 난 결혼 10주년을 맞이한다.
정말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잡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아이 둘을 낳고 키우다 보니 어느새 내가 중년부부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면서 그래도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미즈사이트에서 내 생애 행복한 황금기라는 글을 쓰고 있을때 삶의 굴곡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내가 찾은 인생의 황금기를 난 바로 지금 이 시간들을 꼽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아직은 내게 행복이라는 단어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큰 아이가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멀어져만 간다고 들었는데 난 다행히 아직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둘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많이 안겨주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런 것 같다. 행복은 누가 대신 안겨줄 수도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찾아서 누릴 수 있다고,...그리고 행복이란 물질적인 것만이 채워진다고 되는게 아니라 정신적인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난 이 말들을 불과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제적인 행복이 뒷받침 없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는 반론에서였다. 허나 어제도 방송을 보고 느낀 거지만 정말 행복이라는, 다시말해 인생의 황금기라는 결정은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거라는 거다. 즉 내가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불행해 보여도 바로 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결론내리면 난 인생의 황금기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난 지금 내게 주어진 내 인생의 황금기를 계속 즐기며 살 것이다. 물론 때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삶이 미래의 언젠가는 정 반대의 삶으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그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살기엔 지금이 너무 행복하고 편안하다. 다만 한 가지 지금 갖고 누리는 인생의 황금기가 되도록 길게 유지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조금 쑥쓰럽기도 하고 또 컨셉에 잘 맞는 글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데 어쨌건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삶을 되돌아보고 생각할 기회를 주신 미즈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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