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도전은 누구를 무너뜨리고 올라선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내가 어느 한 점을 목표로 도전할 때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시각에 그 한 점에 목표를 두고 도전한다면, 반드시 상대방을 제쳐야만 다른 한 사람이 그 한 점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이름 하여 그 다른 사람을 불러 우리는 ‘라이벌’이라 하겠다.
짧지 않은 육십 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나는 세상 어느 곳에도 라이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익히 배웠다. 내가 상대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들은 예고도 없이 나를 자기들의 라이벌로 만들어 놓는다. 마치 자동차가 아니, 운전자가 아무리 준법정신에 입각해서 운전을 잘 한다 해도, 상대방이 그릇 된 운전으로 다가와 덮치는 이치와 같다고 말하면 이해가 빠르겠다. 그러니까 세상을 산다는 것은 항상 도전을 받고, 그래서 긴장 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따라서 나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나에게 라이벌이 된다.
그러나 내 목표를 향해 다른 누군가도 같은 목표를 세웠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내 나름의 최선만 다 하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나를 해칠까 싶어서,‘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이게 내 생활의 신조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도 각자가 모두 자기 위치에서 최선만 다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질서다. 가끔은 내 모양새를 훔쳐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럴 때면,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도록 정직하게만 살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도전은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다.
나는 라디오 프로의 상품에 자주 도전을 한다. 가끔은 내가 필요한 상품을 탐내기도 하지만, 필요치 않은 상품에도 도전을 한다. 냉장고, 김치냉장고, 디카 폰, 대형 TV, 공기청정기, 청소기 등등. 냉장고도 문 두 짝이면 족하고, 김치냉장고도 이미 두 개를 쓰고 있으니 충분하다. 디카 폰은 물론이고 TV도 이만하면 내 주재에 넘친다. 공기청정기도 이제는 그 성능에 회의를 느낄 정도로 탐닉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다른 냉장고, 또 다른 김치냉장고 또 다른 디카 폰, 또 다른 대형TV에 눈독을 들인다.
내 주위에는 갖고 싶은 욕심은 있어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도 상관이 없다. 아니,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가지고 싶은 욕심에 따르지 못하면 사실로 말하자면 상관이 없지는 않다. 내가 가진 알량한 것들을 부러워하거나 탐내는 사람들이, 나와 특별한 상관이 있든 아니든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별 것도 아닌 내 것들을, 가지고 싶지만 자질 수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 딱한 일이다. 그나마도 가진 자로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딱하게 여기는 것은 人之常情이다.
못 된 나에게도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싶고 보내고 싶은, 생김보다는 기특한 일면은 있다. 이름 지어 ‘뚝배기보다 장 맛’이라 했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왕지사에 나누어 자지는 상품이라면, 다홍치마가 아니더라도 내 붙이를 생각하자는 심산이다. 다행인 것은 내게,
“글을 쓰는 재주가 있다.”는 말을 좀 듣는다는 것이다. 별로 어렵지 않게 각 라디오 프로그람의 상품을 따 낸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 집에 있는 침대며 가전제품은 거의가 내 글쓰기로 따 낸 상품들이다. 이미 포화상태가 된 것들은, 조카들에게로 언니에게로 보낸다. 그 아니 좋은가 말이다. 인심 쓰고 인심 얻으니 一擧兩得이다. 남에게 베풀어서 기분이 좋음은,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하고는 절대로,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다른 쪽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아직도 남편에게 한국 최고의 승용차를 사 주겠다고 好言한다. 환갑의 나이고 벌이도 없는 주재에 말이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어제도 시골 작은댁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에서, 앞에 가는 승용차를 가리키며 운전을 하는 그이 옆에서 종알거렸다.
“저 차 좋다. 비싼 거야?”
“한 오 천은 줘야지.”“그게 제일 좋은 차유?”“아니, 일억은 줘야 ‘에쿠스’ 살 걸?”
“내가 당신 그거 사 줄께.”“또? 돈 많이 벌었나?”여러 번 그이에게 들려준 이야기라서, 이제는 웃지도 않고 대구를 한다.
한창 잘 나가던 젊은 시절에, 나는 곧잘 그이에게 말하곤 했다.“여보. 난 당신한테 제일 좋은 승용차를 사 주고 싶어.”황당한 말인 줄 알면서도, 그이는 활짝 웃곤 했다. 그이도 내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어느 정도는 믿었기 때문일 게다.
“아이들 공부 어지간히 끝내면, 꼭 당신한테 제일 비싼 승용차 태울 거야.”
운전 보조석에서 달랑거리는 아내를, 그이는 그윽한 눈으로 돌려보곤 했다.
어지간하게 끝낼 줄 알았던 아이들의 공부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늙은 나이에 자식 욕심을 부린 탓도 있지만, 남다른 아이들의 학구열이 그이와 나에게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한다. 고로 그이의 ‘비싸고 좋은 승용차’는 멀리 사라지고, 아직도 ‘소나타2’인 채로다. 삼십이 넘은 아들은 제 아비의 승용차가 미안해서, 제 차도 못 산다지 않는가. 칠순을 바라보는 그이의 백발이 눈부시고, ‘황소눈깔’이던 내 눈도 이제 눈꺼풀에 덮혀 세상이 점점 좁아 보인다. 그래서 그 ‘비싸고 좋은 승용차’는 언제나 그이와 내 가슴에서만 세차게 바퀴를 굴린다.
그래도 나는 그이에게 그 ‘비싸고 좋은 승용차’ 태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도전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도 좋아. 아직은 포기 못하지.”
나의 이런 말에 그이가 한심스러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아니, 그이는 아직도 내 젊은 날의 열정을 믿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내게 그런 정열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그이가 고맙다. 그러니까 나는 그이에게는 아직도 ‘젊은 아내’로 있다는 말씀이렸다. 이게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다. 지금도 도전할 수 있는 나만의 원동력이다.
한 마디만 더 하자. 내가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어려서 문학소년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을까? 중・고등학교에서의 나는 자타가 공인한 ‘장래의 작가’였다. 친정어머니의 말씀대로 라면, 나는 세월을 잘 못 만나서, 그 동안 양장계에 있었다고 치자. 그 40년 동안 하루도 문단을 동경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문단은 내가 동경하던 문단이 아니다. 내가 섞이고 싶지 않은 문단이라고 한다면 건방진 표현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많겠으니 이쯤만 얘기하자. 나는 문단을 논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니 말이다.
나는 지금 글쓰기를 즐겨 하지만, 작가라고 자칭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작가만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글쓰기에 좀 부족한 사람도, 글을 쓸 수는 있다는 말이다. 이 나이에 이런 말이 궁색한 변명이라고 궐기하는 사람이 많겠다. 그러나 지금은 부족하지만, 작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누구라도 인정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류 마가렛・미첼과 같은 소설가. 단 한 편의 소설을 남기더라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작가 말이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글쓰기에 도전한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전만 하다가 끝이 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도전할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음의 증거이니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