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교통정리를 하다

글쓴이 만석

등록일 2004-11-20 01:13

조회수 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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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거의 다 되 갈 무렵, 인터폰이 가볍게 울리다 말고 멈춘다. 누군가 벨을 누르기는 한 모양인데,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야행성인 우리 식구들이지만, 이런 야밤에는 그이가 전담.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그리가 얼른 일어난다. 인터폰을 열어보던 그이가 말 없이 버튼을 누른다.
"누구야?"
"인섭이."
내 물음엔 짧게 대답하고 현관 문을 열고 방문객을 맞는다.

"어서 와."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소리로 불러들인다. 한 잔 걸쳤는지 인섭씨가 벌건 얼굴로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한 잔 하셨네요."
"죄송합니다. 갈 때가 없어서 왔습니다."
"잘 왔어."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이가 인섭씨를 대변한다.

멀쩡하게 가정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이 갈 곳이 없다 한다. 또 부부싸움을 한 모양이다. 그이도 그렇게 집작하는 모양이다. 인섭씨는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늘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대학교 후배인 인섭씨네 부부를 중매했다는 책임을 길게도 묻고 있다. 벌써 20년도 지났는데 말이다.

물으나 마나 한 잔 더 찾을 게 뻔하다. 자처해서 술상을 보아주는 편이 보기도 좋고 내 심사도 편하다. 양주와 마른 안주를 주방의 식탁에 늘어놓고 웃어보인다.
"전, 자요."
언제나 치루던 수순이다.
"죄송합니다.'

정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부시시 일어나 시계를 보니 2시. 주방에서는 아직도 술타령인가 보다. 내일 출근들을 어떻게 할꼬. 걱정을 하며 눈을 비비는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그이가 말 수가 늘어진 걸 보아 하니, 술이 어지간히 취했나 보다.

"우형은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난 모르는 척 하지. 두 사람이 해결하라구."
"그게 됩디까?"
"되지. 안 될 게 뭐야?"
"두 사람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데요?"
"그래서? 자네가 어머님과 아주머니 사이에 낀다고 달라지던가?"
"......"
"결국 자네가 우리 집으로 피신을 왔잖은가?"
"허긴 그러네요. 근데, 사람이 점점 거칠어져요."

잠시 말이 없더니 그이가 다시 입을 연다.
"아주머니가 몇 살 되셨나?"
"마흔이 넘었지요."
남의 부인 나이를 묻는 그이나, 오 십을 바라보는 부인을 이제 마흔이 갓 넘은 듯이 말하는 인섭씨나 취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젠 거칠어질 때가 되셨지."
"도통 꺽이질 않아요. 나보다 더 큰 소릴 내요."
"마누라 나이 사 십 전에는, 그냥 마누라를 나무라게 되지만, 이제 오 십을 바라보면 어머님을 나무라는 편이 수월하네."
"......"
"어머니는 기력이 쇠약해지셨고, 마누라는 더 거칠어지게 마련이지. 이제는 차라리 어머님을 주저앉히는 일이 더 나아요."

한 동안 말들이 없다가, 그이가 또 먼저 입을 연다.
"나는 말야. 어머니랑 그 사람이 부딪쳐두 모르는 척했지. 그게 편하드라구. 근데, 이제는 그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어머니랑 맞서. 그게 어머니랑 그 사람이 부딪치지 않게 하는 방법이야. 내가 불효를 많이 하지."
그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길게 꼬리를 흔들며 사라진다.

정말 그랬던 것일까? 그이가 어머니의 역정에 먼저 소리를 지르고 잠을 재우는 일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일이 어머니와 나 사이를 교통정리 하느라고 그랬다구? 그런 심오한 계산이 있었다면... 섬뜻한 기분이 든다. 고부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이의 모습보다는, 나를 쏘아보는 그이의 눈길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그이의 혀 꼬인 설교에 가슴이 저려온다.
"말이지. 내 어머니를 모셔주는 마누라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야. 내 대신 내 어머니를 모셔주는 사람이니 그렇지. 생각해 보라구. 어머님이 내 마누라 어릴 때 기저귀 한 번을 갈아 주셨겠어? 그래두 마누라는 며느리라는 굴레에 묶여서 어머니를 공양하지 않나 말이야. 자네 딸이나 내 딸을 생각해 보자구. 기르기는 제 어미가 공들여 길렀는데 말야. 걔들 시집에 가서 시어머니 공경하구 살 거라구. 허허허. 시댁에서는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냐? 근데, 그게 그렇지를 않더라구. 말 하자면 우리 남자들 대신해서 어머니를 모시는 거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 모시는 마누라한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거야. 그게 잘 안 되면 그게 효도하는 거라구 자위하라구."

취 중에 본심이라. 그이가 말이 많은 걸 보니, 취하긴 많이 취한 모양이다.앉아있는 등줄기가 써늘하다. 아직 겨울은 멀었는데 이놈의 등줄기는 왜 이리 시리고 가슴은 또 왜 이리 저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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