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큰 아이 운동회였습니다. 1학년때는 잠깐 들렸다가 얼굴만 봤던 거 같고,
2학년때는 제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운동회때 입어야 한다며 이거 저거 만들어야 한다더니 도시락도 싸주고 엄마도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이다.
안가면 안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된다며 엄마 안오는 아이들끼리 같이 점심을 먹겠다고 하는데 아이 목소리에 물기가 묻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맘이 금세 약해져서, 그래 엄마가 도시락 싸서 가져갈께(물론 싸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사가겠다는 말이지요. ^^;) 했더니 아들 왈, 하루종일 운동회 하는데 점심때만 와도 된다며 인심을 쓰는 목소리에 바로 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 오늘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무실에서 죽어도 10시엔 나가야지 했는데 11시 10분에 나와서 꽉꽉 막히는 도로를 헤치고 바람을 가르며 백화점 식품코너에 내려가서 김밥 두개 주문해놓고, 고개를 돌리니 샐러드도 팔길래 샐러드 주문해서 포장하는 사이, 그 옆에 떡도 팔길래 떡 하나 주문해서 결제하는 사이에(주머니가 비어서 카드로 결제를.... ㅜ.ㅜ) 숨도 안쉬고 뛰어가서 음료수 사들고 다시 거꾸로 돌아서 떡코너에 와서 카드 받아들고, 그 옆으로 가서 샐러드 포장한거 받아서, 고개를 돌려서 김밥 포장해놓은 걸 들고서 후다닥 뛰어 나왔습니다. 오전 장사로 막 북적이던 식품부를 완전히 한바탕 휘젓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
허덕거리면서 학교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10분. 교실에 뛰어 올라가다가 아들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혹시나 또 정신머리 없는 엄마가 못오지나 않았을까 싶어서 두리번 거리던 아들의 눈은 반가움에 반짝거리고 입은 좋아서 다물어지질 않았습니다. 엄마가 오지 않은 아이 둘과 책상에 사들고 간 도시락을 펴놓았는데, 교실에 계시던 담임 선생님 뵙기에 더 민망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
아이들 밥 먹는 걸 챙겨주고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엄마 안온 아이들이 기가 죽거나 하지도 않았죠. 아이들은 그렇게 크고...옆에서는 딸가진 엄마가 딸이랑 친구들 사진도 찍어주는데,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뒷정리를 하면서 나는 왜 그 생각도 못했을까 싶다가 여기까지 온 것도 어딘데..싶어서 혼자서 픽웃었습니다.
순식간에 점심을 치우고 나오는데 운동장에는 오후 운동회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울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나는 그냥 먼지 가득 끼인 가을 햇살을 받으며 멍하게 서서 운동장에서 달리고 뛰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옆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웃음띤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가 더 나이 들고, 내 아이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이렇게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서 운동회를 할까요. 나는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때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지....
엄마라는 이름이나, 또는 일하는 여자라는 이름이나...오늘 모두 그렇게 즐겁고 자신만만하고 그런 것도 아니고....우울하고 기분 나쁘고 지친, 그런 날이었지만...
오후에 전화해보니, 아이는 운동회 일은 모두 잊어버렸는지...전화를 받은 둘째에게 오빠는 뭐하니..하고 물었더니 "콤파스 쓰는 법을 연구중이야."라고 합니다.
엄마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정신없이 허둥거렸는지...아이는 잘 모르겠지요. 그런 걸 알아달라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너무 정신이 없네요. 이런 일상들이 ....
훔...그래서 오후 내내 모든 일을 잠시 묻어두고 책상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책상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서류들과 책을 모두 바닥으로 던져 놓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영수증을 쓸어 담아 놓았다가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책상은 다시 어수선해지고...그런 하루가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