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이번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탈레반이 나라 이름인지 사람인지 하며 묻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들은 중동 쪽 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의 간략한 역사와 탈레반 정권의 등장, 비참한 경제상황들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아는 게 없어서 이러저러한 정보들을 짜집기하였다. (그나마 읽을 만한 걸로 골라서)
1. 탈레반
아프가니스탄의 무장회교학생단체. 94년 10월 아프간 칸다하르주에서 결성하여 국토의 3/1을 장악한 뒤 꼭 1년만에 카불을 함락시킴으로써 피비린내나는 14년간의 내전과 4년에 걸친 무자헤딘 (회교반군)내 권력 투쟁을 종식시켰다.
탈레반의 병력은 2만 5천여 명의 회교학생들로 구성된 핵심지도부와 퇴역장교, 탈영게릴라, 전 무자헤딘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지불라 전 대통령 형제를 공개 초형하고 과도 정부를 세워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부패에 물들지 않고, 일상 상업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내전에 지친 대중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 금지, 여학교 폐쇄, 가혹한 회교식 처벌 부활 등 탈레반의 급진적 회교정책이 큰 부작용을 낳고 있다.
2. 탈레반 정책 결정하는 울라마 會議
탈레반 최고 지도자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이번 뿐 아니라 탈레반의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반드시 울라마(이슬람 율법학자) 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묻고 결정에 따르는 형식을 취해왔다.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주의 석불 파괴여부를 결정할 때도 울라마 회의를 통해서였다.
이번에도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지하드(聖戰)를 선포할 것인지 여부와 빈 라덴 인도 여부 문제를 울라마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오마르는 파키스탄 내 아프간 난민촌의 울라마를 포함해 사상 가장 많은 울라마들ㅇ르 소집했다.
오마르는 그동안 자신이 舊소련의 침공 때문에 이슬람 율법을 충분히 공부하지 못해 물라(스승)가 아니라 탈리브(학생)이라고 자처하며 중대 국사는 모두 울라마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오마르 자신이 `아미룰 모미닌'(신자들의 사령관)이라는 칭호와 함께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로 선출된 것도 칸다하르에서 열린 울라마회의를 통해서였다.
3. 아프가니스탄의 간단한 역사
아프가니스탄은 동서교역의 통로였던 비단길의 중심이다. 이곳은 언제나 다양한 동서양의 문화들이 오고 갔으며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수많은 종족들로부터 침략을 받아와야만 했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막기 위해 영국은 끊임없는 아프가니스탄의 식민지화를 시도했으나 아프가니스탄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비동맹 중립 노선을 취했지만 이웃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경계의식 때문에 소련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소련에게 아프가니스탄은 꿩먹고 알먹는 지역이었다. 인도와 페르시아만으로 향하는 기가 막히는 지정학적 위치에다가, 혹시라도 있을 소련 내 이슬람 공화국들의 이슬람 운동을 막는 방패막이기도 했다.
79년 정부수반 무하마드 타라키가 암살되며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후원을 받는 정부군과 이슬람 반군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그러자 소비에트군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해 새로운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려 했고, 이슬람 반군은 결사투쟁을 선포했다. '소비에트판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었다.
10만명이 넘는 소비에트의 군사 배치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의 게릴라 전술은 소련군을 끊임없이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미국 등 서방국가와 파키스탄으로부터 무제한의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았고 수백만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언제든지 지하드(성전)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서방은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비롯한 외교, 경제적 대소제재를 시작했고 중국을 위시한 각국의 공산당 역시 소비에트를 비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고르바쵸프의 집권 이전까지 끊임없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서 지리한 전투를 계속해 나갔다.
결국 고르바쵸프의 개방정책 하에서 유엔의 중재로 열린 협상은 1989년 2월 15일까지 소비에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한다는 미-소 협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소비에트군 철수 이후에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소비에트의 허수아비 '나지불라 정권'에게 소비에트는 여전히 무기를 공급했던 것이다. 반면 반군은 내분에 시달리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2년 4월 무자헤딘은 수도 카불을 함락하고 나지불라를 처형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끝이 아니었다. 무자헤딘의 각 파벌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또다른 전투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 지리한 내전의 도가니에서 어느덧 아프가니스탄은 괴물을 낳을 태세가 되어 있었다. 1994년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학생 단체 '탈레반'이 등장했다. 파슈툰어로 '구도자'라는 뜻의 탈레반은 94년초 파키스탄 접경의 코란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인민을 선두에 앞세우는 철저한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신의 군대'였고 오랜 내전에 지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지지도 받았다. 각 파벌의 지도자들도 오래지 않아 상당수가 탈레반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6년 9월 27일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통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의 태동을 알렸다. 북부지역으로 부리나케 도망쳐 역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 정부군을 남겨두고.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이 98년부터 아프카을‘테러 지원국’으로 지목해 금수 조처를 내림에 따라 경제가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99년 1인당 국민소득은 800달러 수준. 오랜 전쟁과 내전으로 90년까지 이미 100만명 이상이 숨졌으며 지난 해부터 반(反)탈레반군과 전면전 수준의 내전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