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젠더프리가 여자든 남자든 연기할 수 있는 기회라기 보다는, 여자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폭이 좁은 상태에서 둘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넌 어떠냐, 아들."이 아닌 "넌 어떠냐, 딸"이라는 말로 지금까지 쓰여왔던 호칭을 모호하게 만드는 순간 그동안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남자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해야했던 여자 관객인 내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여자 배우를 남자 캐릭터에 억지로 끼어넣기 보다는 그 역할 자체에 충실하게 연기했던 배우들을 통해 표출됐기에, 남성의 목소리로만 끊임없이 재생산되거나 제시되었던 이야기들이 결국 무대 위에 이야기를 세우는 창작진의 편견과 게으름 때문에 지워졌을 뿐, 결국 여자의 이야기도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여자 배우의 목소리로 구현되었을 때 비로써 집 안에 갇혀, 본인의 능력에 미치지 않게, 그리고 배운 것을 감춰야했던 필립을 보면서 자신의 능력이 평가절하되거나, 아니면 재능을 숨겨야했던 수 많은 여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초연 때도 이 공연을 적지 않게 봤지만, 필립을 보면서 집 안에 갇힌 여자들을 떠올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저 필립을 보면서 가족 내 가스라이팅, 그리고 그 조차도 나와는 거리가 있는 상태로 극을 해석해나갔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내 시선 차도 감상이 달라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다시 남성 인물로써 필립이 표현됐다면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가진 완벽과 감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 학벌 낮은 남자가 자기 부인이 공부해 대학에 합격함으로써 자기보다 학벌 높아졌다는 이유로 손가락 자르고, 그 사람 친척은 봉합할 수 없도록 그 손가락 쓰레기통에 버려 숨겼다는 실제 사건을 떠올린다. 꼭 외국 사례가 아니더라도, 엄마 세대로만 올라가도 공부 잘하는 데, 공부 못하는 남자들 때문에 진학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그렇게 오랜시간 여성의 능력을 보호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상태로 감춰져 있었다.
나는 특히 최수진이라는 배우가 구현해내는 필립이 가진 단호함이 좋았다. 처음으로 혼자서 산책 다녀오고, 너는 원래 그랬었다고, 나는 너를 잘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다며 화를 내는 트릿 말에 대꾸할 때, 트릿의 폭력적인 모먼트에서 움찔하지 않고 꿋꿋하게 서, 트릿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유에 대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성장에 대해 떠올렸다. 극 초반 역시 트릿이 알려준 거짓 공포에 갇혀있었을 뿐, 집 안에서 금지된 행위를 지속해서 함으로써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받침을 만들었고, 트릿이 만든 공포가 거짓이라는 걸 알려준 해롤드가 제 곁에 다가왔을 때, 지금까지 참아왔던 걸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필립이라는 캐릭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수진 필립은 갇힌 세상 속에 한정된 언어와 행동만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보호자인 트릿을 위한, 혹은 그 아래에서 계속 있기 위한 타협이라는 게 너무너무 잘 보여서 매 순간이 놀람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필립이 최종적으로 원했던 것들은 트릿 비호 아래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트릿의 세상은 필립을 지키는 게 전부였기에 해롤드의 등장으로 필립은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트릿은 나름의 타협과 안정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향한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이 극을 통해, 그리고 다른 매체 속에 겹쳐지는 수 많은 필립과 트릿을 통해 이 흥미가 어떻게 해석이 될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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