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 예비 신부/주부(?)의 시댁 나들이

예비 신부/주부(?)의 시댁 나들이
글쓴이 송이 등록일 2005-02-11 12:00 조회수 2,300 글자확대 글자축소

보통 설 연휴에는 집에서 쉬거나 일가 친척들을 가끔 찾아 뵙고
아니면 집으로 찾아오곤 했는데 보통은 편하게 쉬었다.
그러나 올해 설은 남자친구의 집으로 인사를 가야했다.
가기 며칠 전부터 긴장을 했던지라... 전날 잠도 잘 안오고 기차 안에서 잠도 오지않았다.

ktx를 처음 타봤는데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지 좌석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바깥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미장원부터 찾았다. 아침 9시 차를 탔게 때문에 미장원에 들릴 여유가 없었다.

역근처에 있는 미장원으로 들어가서 후다닥 머리를 했다.
계속가던 미장원이 아니라서 그런지 머리도 마음에 안들고... ...
다행이 집근처에 백화점이 있어서 할머니 선물과 부모님 선물을 하나씩 샀다.

혹시 마음에 안드시면 바꾸시라고 점원에게 환불이나 교환이 되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만지고 집으로 향했다.
문앞에서 가슴이 조금 떨렸다.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이틀을 이곳에서 지내야하는데... 부담감이 몰려왔다. 기차표 좌석이 있는 것을 찾다보니 어쩔수 없이 이박 삼일을 보내야만 했다.

드디어 아담한 시골집 앞에 도착.
시골집 옆으로는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집 건너편에는 논들이
있고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집 근처는 여느 시골집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들 뒤로는 산과 나무가 있고 바람에 대나무들이 쏴~ 몰려왔다 쏴~ 몰려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드디어 대문 앞에 도달하였고 어머니께서 나오셨다.
꾸벅 인사를 드렸다. 모두 웃으면서 맞아 주셨다.
일단 마음은 놓였고, 안으로 들어가니 노할머니가 계셨다.

90세가 넘으셔서 크게 말씀을 드려야 알아들으셨다.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은 자유롭지 않으셨지만 뜨게질은 계속하셨다.
손수 뜨신 양말도 신고계셨다.
밤이면 아주 소중한 보물인 듯 방 한구석에 잘 접어서 두셨다.

우리는 준비한 효도신발을 신겨드렸다.
할머니는 돈도 없는데 이런거 사왔다고 나무라시면서도 손자 며느리가 준비한거라니 내심 좋으신 모양이었다.

젊은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담 같은 곳에 손을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집안은 입식으로 되어있어 춥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마당에는 새로 태어난 일곱마리의 강아지들이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면 추위를 막아내려고 몸을 이리저리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강아지들 사진을 찍는 다며 마당으로 나갔고 나는 덜렁 혼자 남았다. 이거 어쩌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남자친구를 따라가야할 것인가? 큰소리로 말해야만 알아들으시는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어야하나? 아니면 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가야하나?'
결정했다. 첫날은 어렵더라도 할머니와 같이 있자.
그리고 식사 차릴때만 어머니를 돕자... 설거지는 내가하자...

일단 할머니와 같이 앉아 큰소리로 얘기 해야하긴 하지만 할머니가 좋아하셔서 어머니에게 눈치가 덜 보였다.

할머니는 살아온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젊어서 일본 여기 저기서 살던 이야기, 또 다른 나라에서 잠깐 사시던 이야기를 하시며 내손을 꼭 잡으셨다.
편하게 사시다가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고생한 이야기들...

남자친구 이름이 특이해서 옛날에 당신 친구분들이 지어주셨다는 노래도 불러주셨다. 마치 <우리의 소리를 찾아>라는 방송 프로에 나오는 그런 노래 소리였다. 짧지만 노래가락이 구수하고 좋았다.

나이 많은 분이랑 이렇게 길게 대화해 본 적도, 같이 살아본 적도 없어서 신기하기도 했고, 조심스럽긴 했지만 느낌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부엌이 좁고 처음이니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남자친구는 피곤하다며 저녁을 먹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자버렸다.
초저녁에 잠도 안오고 민숭민숭하고 설거지하는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어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왜 당신 아들과 결혼하려하는지 뭐가 좋은지 기타 등등 중요한 질문들을 하셨고 나는 평소 느낀대로 말씀드렸다. 대답이 마음에 드셨는지 웃으셨다.

다음날 아침 잠을 잤는지 안잤는지 구분을 할 수 없이 뒤척였다.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약밥을 먹었다. 달짝지근한 것이 맛있었다.
그 후로 계속 먹을 것을 주셔서 배는 불렀으나 모두 받아 먹었다.

오후에는 남자친구와 할머니만 집에 계셔서 할머니 방에서만 있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데 내가 옆에 있어서 좋으신 것 같았다.
간간히 힘이 나시면 자주 오라고 하셨다.
답답하시다며 할머니는 마루로 나오셔 우리와 같이 군고구마와 과일을 드셨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할머니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할머니 무릎에 담요를 덮어드리고 할머니를 꼭 안고 사진을 찍었다.
디지탈이라 찍은 사진을 바로 보여드리자 할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나도 기뻤다.

할머니께서는 글씨를 크게 쓰면 읽을 수 있으니 편지를 자주 하라고 하셨다.
전화를 해도 잘 못들으셔서 오히려 편지가 나을 것 같긴했지만 인터넷에 익숙해져서... ...

점점 남의 집이라는 생각이 줄어들고 편안해 졌다.
나는 할머니와 짧게 포옹을하고 집을 나왔다.

가는 기차안에서 우리는 바깥 풍경 사진을 찍고 어머니께서 싸주신 소박한 도시락도 먹고 재밌게 서울로 왔다.

사진현상을 해서 할머니께 보내드려야 겠다.

모닝페이퍼